▲ 대종교 총본사(사진=윤한주 기자)
파란 지붕과 하얀 벽이 인상적인 대종교 총본사는 1980년대 홍은동에 터를 잡고 세워진 건물 그대로였다.
천궁에 들어가면 신라때 화가 솔거(率居)가 꿈속에서 단군을 보고 그렸다는 단군 천진(天眞)이 있다. 신자들은 천진을 향해 4번 절을 올린다.
왼쪽 방에는 역대 대종사인 홍암 나철,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단애 윤세복의 진영(眞影)이다. 오른쪽 방에는 1942년 임오년에 일어난 일제의 대종교 박해사건으로 순국한 10명의 간부를 임오십현(壬午十賢)이다.
지난 2011년 8월 13일 광복절을 앞두고 대종교 총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대종교 관계자는 두 손 가득히 오래된 책들을 가져왔다. 독립운동가 유품에 나온 단군영정 사진이었다.
▲ 왼쪽부터 홍암 나철을 비롯한 대종교 지도자와 임오십현(사진=윤한주 기자)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신건식(申健植) 선생님의 집에서 유품으로 나온 단군 영정을 직접 봤어요. 이 정도 크기인 것 같아요. 당시에 직접 품에 가지고 다니기에는 큰 것 같고, 집에 모셔두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명부를 보여주었다. 그곳에 낯익은 이름이 들어 있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말을 남긴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이었다.
대종교 측은 단재외에도 백암 박은식 선생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대종교에 입교했다고 밝혔다. 또 중광한 지 불과 5∼6년 만에 20만 명의 신도 수를 확보할만큼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로 대종교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 독립운동가의 유품에서 발견된 '단군영정'(사진=윤한주 기자)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부터 언론과 사회 모든 분야에서 불기 시작한 단군숭봉운동이었다.
나철은 당대 최고의 정치적 거목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제자이자 유학자로서 을사오적 처단과 대일 외교 등을 주도한 인물이었다.그러나 대일 외교 등의 정치적인 방법이 모두 실패하자,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의 가치를 통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단군정신’을 만나게 된다.
이어 1909년 1월에 중광한 대종교는 당시 전국적으로 불기 시작한 단군숭봉운동에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건너가 학교를 세우고 단군의 정신으로 대일항쟁을 이끌었던 대종교 3대 종사의 묘는 이역만리 중국에서 찾는 후손도 없이 쓸쓸히 모셔져 있다. 추모비만 총본사에 세워져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한편 대종교의 4대 경절에는 제천의례인 ‘선의식’이 봉행된다. 개천절(음력 10월 3일)과 단군이 하늘에 오른 어천절(음력 3월 15일), 중광절(음력 1월 15일), 나철이 하늘에 오른 가경절(음력 8월 15일)이 그것이다.
▲ 대종교 선의식(사진=윤한주 기자)
선의식의 ‘선(示+亶)’자는 ‘천제 선, 제사지낼 선’자로서 한얼님(하느님)께 제사 지내는 제천의례를 말한다.
의례복은 백색이다. 백의민족을 상징하고 국조 단군 한배검의 은혜에 정성을 다하여 보답한다는 마음의 표상이다. 천반, 천향, 천등도 백색이었다.
선의식에 올려지는 제폐나, 사용되는 제구의 모양과 복식의 형태, 신상의 배치 등이 모두 원방각의 삼원(三元)으로 구성됐다. 원방각(圓方角)은 천지인(天地人)을 나타낸다. 이는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참성단(塹城壇)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단군이 승하한 어천절은 참성단에서 거행한다.
∎ 찾아가는 방법 :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1동 13-78
서울지하철 3호선 홍제역 2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11번이나 13번을 탄다. 서울여자간호대학에서 내리고 약수터 방면으로 5분 걸어서 올라간다.
∎ 전화 02-394-8930
글. 사진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