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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을 여행하듯이
여행을 생활하듯이
박웅현은 대한민국 광고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광고쟁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KTF)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빈폴) ‘사람을 향합니다’(SK텔레콤) ‘진심이 짓는다’(e편한세상) 등 그가 만든 광고 카피 몇 개만 들어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톡톡 튀는 발상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도배되다시피 한 광고 속에서 유독 그의 광고가 눈에 띄는 이유가 궁금했다.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낚다
박웅현은 톡톡 튀지 않는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패션 감각이 남다르다는 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건 ‘트렌디함’이라기보다는 ‘댄디함’에 가깝다. 광고라는 적자생존의 밀림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하는 그는 두 눈 부릅뜨고 먹이를 노리는 맹수보다는 일상 속에서 세월을 낚는 강태공을 닮았다.
그의 광고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수많은 히트 광고를 만들어왔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의 광고는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쪽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기껏해야 몇 초짜리 광고에 금세 공감이 가고 마음이 움직인다. 아마도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광고를 만드는 비법이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어떻게 해요?’하고 물어오면 저는 ‘그냥 생활을 합니다’ 그래요. 평소처럼 출근하고 밥 먹고 버스 타고 음악 듣고 그러죠.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면벽 수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저 일상을 잘 들여다보는 거죠.”
그는 창의성의 본질이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남들이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독특하고 희귀한 발상에서 창의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광고주와 소비자 사이를 소통시키는 광고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발견해내려면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그저 평소처럼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진심이 짓는다’는 카피로 히트한 아파트 광고도 그렇게 나왔다.
“모티브만 정하면 되는데, 그게 전혀 안 되는 거예요. 별수 있나요. 책상에 앉아서 고민한다고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그저 답답한 채로 평상시처럼 생활을 하는 거죠. 퇴근해서 아내와 와인 한잔 하면서 재즈를 듣는데, 그때 흘러가는 음 하나가 딱 잡히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참 무서운 게, 일부러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내가 음의 모티브를 고민하고 있으면 모든 세포가 흘러가는 음들을 아주 예민하게 잡아내요. 그러니 아이디어가 어디에 있겠어요? 일상 속에 있는 거지.”
많이 느끼는 삶이 풍요로운 삶이다
그렇다 해도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공감할 만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포착해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박웅현이 강조하는 것이 감성이다.
“돈이 많은 게 풍요로운 걸까요? 저는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 보지 못한 감성까지 들어가 보는 게 진정한 풍요라고 생각해요.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음악이 다 똑같지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맞은 햇살이 너무 좋고, 출근길에 들은 음악을 잊을 수 없다고 해요.
똑같은 음악을 듣고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 똑같은 그림을 보고도 소름이 돋는다는 사람, 똑같은 책을 읽고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람. 이런 사람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 아닐까요? 그런 감성을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는 광고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감성을 벼릴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그런 감성을 유지한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맞아요. 쉽지 않죠. 그래서 우리 딸한테 알려준 비법이 있는데 ‘생활은 여행하듯이, 여행은 생활하듯이’ 하라는 거예요.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늘 볼 수 없기 때문이죠. 생활을 생활하듯이 하면 일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평생을 달려왔다고 생각하면, 뇌가 사물을 인식하는 자세가 달라지죠. 생활을 여행하듯이 하면 일상의 모든 것이 뇌세포를 건드려요. 그러면 인생이 풍요로워지죠.”?
삶은 순간순간의 합이다
뜻밖이다. 가장 대중적인 광고를 만드는 사람에게 창의성에 대해 물으러 왔다가 인생에 대한 문답을 하고 있는 모양새라니. 박웅현의 삶의 태도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쉬운데, 그냥 하면 되는데”라고 했다.
“인생이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레이스라고 보면 그렇게 살기 어려워요. 명문대를 가기 위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20억을 모으기 위해 지금 현재를 포기하다 보면 어느새 여든 살이 되어버리잖아요. 그게 무슨 인생이에요? 그건 인생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삶은 순간순간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합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불행한 것 아닐까요?”
그는 인생의 정점은 시상식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방이나 거실에 있다고 믿는다. 죽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이 ‘아, 그때 그 프레젠테이션 좀 더 잘해서 이길걸…’ 이런 게 아니라 더 이상 일요일 낮에 좋아하는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 더 이상 아내와 모찌떡을 구워 먹을 수 없는 것일 거라며.
순간순간의 합인 인생을 가장 잘살아가는 방법은 당연히 현재에 충실한 것, 미리 걱정하지 않는 것. 누구나 겪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가장 충일한 순간을 낚아 올릴 수 있는 감성, 박웅현이 광고를 만드는 힘이다.
글·전채연 ccyy74@brainmedia.co.kr | 사진·김명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