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로도 널리 알려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러시아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극명하게 대립하는 두 가지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무서운 비극으로 끝나는 육체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소통의 노력 끝에 이루어지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첫 번째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은 고위 관료의 아내인 안나 카레니나로 그녀는 젊고 잘생긴 청년 장교와 불륜을 저지릅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로맨스의 전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육체적 끌림에 의해 주도된, 그리하여 육체적 매력이 식어버리자 쉽게 허물어지는 덧없는 사랑입니다. 안나는 실망과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안나의 반대편에는 소설 속에서 톨스토이의 이상을 대변하는 도덕적인 인물 레빈과 그의 연인 키티가 있습니다. 키티는 처음에 미남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쏠려 레빈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매혹당한 것을 알고 깊은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결국 레빈의 진정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결혼하여 진실한 관계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갑니다. 레빈과 키티의 사랑은 완덕完德에 이르는 인간 성장의 궤적을 보여줍니다.
안나 카레니나와 키티의 모방 본능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두 인물의 상반된 운명을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모방 본능을 중요한 변수로 집어넣는다는 사실입니다. 파멸로 나아가는 안나의 운명, 그리고 도덕적인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키티의 운명, 이 두 운명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것은 모방의 방식입니다. 이 점을 조금 자세히 살펴볼까요.
모스크바의 무도회에서 브론스키와 열정적으로 춤을 춘 안나는 도덕적인 딜레마에 빠집니다. 브론스키는 너무도 매력적인 남성이지만 자신은 가정이 있는 부인입니다. 그래서 도망치듯 페테르부르크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하필이면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삼류소설을 읽습니다. 안나는 연애소설을 읽는 동안 등장인물을 그대로 흉내 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찹니다.
도덕심은 무뎌지고 소설 속의 로맨스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결국 브론스키와 내연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까 안나가 도덕의 경계를 넘어서는 데 결정적인 단초가 된 것은 싸구려 연애소설이었던 것입니다.
키티 역시 안나처럼 모방의 단계를 거칩니다. 키티는 요양차 방문한 유럽의 어느 온천장에서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는 바렌카라는 아가씨를 알게 됩니다. 선의 화신처럼 보이는 바렌카의 행동에 키티는 깊이 감동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바렌카의 일거수일투족을 흉내 내기 시작합니다.
키티는 어느새 “걸음걸이며 말투며 눈을 깜빡이는 모양까지 닮아갑니다.” 그러나 키티는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모방하던 바렌카에게서 위선을 감지하고 바렌카의 영향력에서 벗어납니다. 키티는 외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어요! 내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살아갈 거예요!” 바렌카에 대한 모방과 ‘모방에서 벗어나기’를 통해 키티는 몰라보게 성장합니다.
모방의 메커니즘, 거울 뉴런
안나와 키티의 사례는 인간의 뇌 속에 있는 모방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점에서 ‘거울 뉴런’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1990년대 초엽, 이탈리아 파르마대학 소속의 저명한 신경과학자인 지아코모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가 이끄는 연구팀은 원숭이 실험을 통해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뇌 속에는 타인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는 신경세포, 즉 거울 뉴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뇌에 존재하는 거울 뉴런은 타자의 행위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흉내 내려 하는 인간 본능과 직결됩니다. 즉 거울 뉴런 덕택에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보면서 그것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할 뿐 아니라 타인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듣거나 타인의 행동을 묘사하는 글을 읽을 때에도 그 행동을 마치 자기 자신의 행동인 양 뇌 속에서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거울 뉴런의 발견은 그동안 인류가 막연히 인간 본성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모방 본능이 생물학적인 사실임을 확인시켜줍니다. 거울 뉴런 덕분에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모방할 뿐 아니라 타인의 의도와 감정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보는 대로 무엇이든 모방한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것입니다(최악의 경우 모방범죄를 예로 들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모방해야 할까요.
톨스토이의 두 인물은 이에 관해 상당히 문학적인 해답을 제공해줍니다. 안나는 연애소설의 인물을 모방함으로써 파멸의 길로 들어섭니다. 반면 키티는 선의 화신인 여성을 모방하다가 환멸을 느끼면서 성장의 길로 들어섭니다. 안나와 키티는 모방의 대상에 관한 톨스토이의 생각을 분명히 전달합니다.
확실히 우리가 모방하는 타인의 행동, 혹은 우리가 공감하는 타인의 감정이 선하고 훌륭한 것일 때 모방은 적극적으로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반면 그것이 악하고, 추하고, 폭력적이고, 천박한 것일 때는 상당히 위험한 일이 될 것입니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훌륭한 모방의 대상을 제공하는 것은 지식의 제공보다 어찌 보면 더 중요한 교육일 수 있습니다. 청소년에게 위인전을 읽히고 고전을 읽히는 것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키티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모방을 모방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키티가 현실에서 모방하는 대상은 착하고 훌륭한 아가씨입니다. 그러나 만일 키티가 대상의 모방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깨달음입니다. 어느 순간 키티는 모방의 대상을, 더 나아가 세상을, 삶을, 자기 자신을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사람과 세상, 자기 자신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정신은 비약적인 발전과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인간은 모방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모방을 뛰어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모방의 한계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은 결국 성장에의 열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 그리고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훌륭한 자질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글·석영중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뇌를 훔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