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형태가 마음의 빛깔을 바꾼다

몸의 형태가 마음의 빛깔을 바꾼다

명상적 순간

브레인 112호
2025년 09월 09일 (화)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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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적 순간 [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몸은 마음이 가는 곳을 향한다

4:4 미팅을 나갔다. 밀당의 시간. 4명 중 과연 누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가. 누구를 공략해야 회색빛 일상에서 벗어나 핑크빛 청춘을 꽃피워 볼 것인가. 어쩌다 마주친 그대 눈빛은 그저 우연인 것일까. 아니면 나를 향한 무언의 신호일까. 살짝 흘러나온 저 미소는 그냥 재밌어서 웃는 건가. 혹시 나의 애프터를 기다리는 간절한 시그널?

인구절벽의 시대, 인구 증폭의 시대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청춘들을 응원하기 위해 ‘나에게 마음이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몸이 누구를 향해 열려있는지 보는 것이다. 이거면 끝난다. 당신을 보며 웃는데 그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을 향해 있다면,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는 거다(설령 당신의 애프터에 응한다 해도 결국 당신 친구의 전화번호를 물어볼 확률이 높다). 

몸의 운동성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는 초보적인 체크법은 골반의 방향을 보는 것이다. 특히 이 방법은 남자들을 볼 때 잘 통한다. 대개의 경우 남성이 가진 몸의 언어가 좀 더 직설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의 언어가 조금 더 복잡한 사람의 경우에는 골반의 방향만으로는 알기가 어렵다. 

그때는 몸 전체를 봐야 한다. 그 사람이 만들어 내는 몸 전체의 형상을 보고, 지금 어느 방향에서 저 사람을 불렀을 때 가장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틀림없다. 숨길 수가 없는 거다.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할지라도, 몸은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몸 상태를 바꾸면 그에 맞춰 마음이 따라온다

‘몸집’이라고 한다. 몸이 ‘집’이란다. 누가 살길래 몸이 집인 걸까? 예전에는 몸이라는 단어를 ‘ᄆᆞᆷ’으로 썼다. 이 글자는 두 가지로 읽혔다. 몸과 맘. 그렇다. 몸이라는 단어에는 ‘몸과 마음은 하나’임을 깨우친 우리 선조들의 탁월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 몸은 마음의 집이고, 이 둘은 결국 하나다. 

내 마음 나도 모를 때는 ‘몸’을 보면 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를 때도 몸을 보면 된다. 

‘사등이뼈 없는 사람’이라는 속담이 있다. 문장 자체로 보면 척추가 없는 것처럼 몸이 휘었다는 것인데, 이는 마음의 줏대가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럼 사등이뼈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 다시 마음의 줏대를 세우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아주 단순하다. 척추를 바로 세우면 된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줏대 없음을 자책하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고, 마음을 직접 다루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어쩌면 당신은 일상에서 이 효과를 이미 잘 이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누이 손주를 둔 당신이 잠깐 마트에 다녀오니 오빠와 여동생 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간식을 한아름 사들고 맛있게 나눠먹을 손주들을 상상하며 현관문을 연 당신은 처참한 난투극 현장을 목격한다. 발 빠르게 현장에 뛰어들어 두 아이를 떼어 놓으며 상황은 종료되나,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를 이야기해 줄 새도 없이 오누이의 진술이 쏟아져 나온다. ‘쟤가 먼저 잘못했어요’, ‘아니에요! 오빠가 먼저 제 스케치북을 찢었어요.’ 

당신은 알고 있다. 지금은 당신이 묵비권을 행사할 때라는 걸. 신참 엄마 시절엔 ‘그런다고 서로 싸우면 되겠어?’하며 야단쳤지만 이제는 안다. 

벌게진 얼굴, 충혈된 눈, 씩씩거리는 호흡, 잔뜩 힘이 들어간 턱과 어깨. 지금 이 아이들의 상태에서는 ‘사랑과 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가 통할 리 없다. 그래서 당신은 몇 가지 단계에 따라 아이들의 ‘몸’을 바꾸기로 한다.

1.“일단 말하지 마” 입장을 정리하는 거다. “이제 이 상황을 통제하는 주인은 나야 나, 이 할머니“라고 아이에게 명확하게 알려준다. 

2. “벽 보고 서 있어” 뇌로 들어가는 시각 정보를 최대한 차단하는 조치이다. 우리의 뇌가 시시비비를 따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3. “손들어” 이것이 압권이다. 팔을 위로 들어 올리면 팔을 따라 흐르는 폐경락이 활성화하면서 호흡이 편안해진다. 심장과 통하는 경락이 활성화해 화火 기운도 빠져나간다. 

팔에 있는 경락길이 열려 기혈순환이 원활해지면 긴장이 풀리면서 어깨의 힘도 자연스레 빠지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눈에 힘을 주고 숨을 씩씩거리는 어린이에게는 다음 처방을 내리는 수밖에.

4. “무릎꿇어” 무릎을 꿇으면 다리에 흐르는 신장과 방광 경락이 활성화하면서 해당 장기가 관장하는 수水 기운이 운기된다. 수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머리로 올라가면 스트레스 상황에 두뇌로 몰려있던 화 기운이 식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아무리 지조 높은 어린이도 눈에 힘이 풀린다. 

이제 아이들은 바뀐 ‘몸’을 통해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내 마음을 바꿀 준비. 화해할 준비. 
 

▲ 명상적 순간 [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자신에게 필요한 마음을 불러내는 방법

그럼 다 큰 성인인 우리가 일상에서 ‘바른 마음’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몸’ 상태를 만들어야 할까? 답은 ‘모른다’이다. 어떤 해법을 기대하며 여기까지 글을 따라와 준 당신께 너무나도 송구하지만, 그런 몸은 없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와 상황 속에서 무척이나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때에 따라 필요한 마음가짐 또한 달라진다. 

‘바른 마음’이라고 정해진 하나의 마음은 없다. 하여 ‘바른 몸’이라고 정해진 표준의 몸도 없다.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 화를 내지 못하는 성격이라면, 화를 부를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존심을 내려놔야 하는 상황인데 그게 안 돼서 힘들다면, 일단 몸부터 아랫사람의 몸으로 디자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몸’에 머물다 보면 그 몸에 맞는 ‘마음’이 올라온다. 그저 그렇게 이용할 뿐이다. 

‘이런 몸이 좋은 몸이다’, ‘이런 몸을 만들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당신의 몸과 마음을 그렇게 단순하게 규격화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 스스로 원하는 ‘몸’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마음’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그것을 창조할 수 있는 온전한 주체이다. 

당신은 당신의 창조주이다. 자기 자신이 몸과 마음의 주인임을 알고, 창조성을 즐겁게 경험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     

용기가 필요한가? 호랑이 기운이 필요하다고 콘푸로스트 시리얼을 먹을 것이 아니라, 호랑이의 몸짓을 해보라. 자신에게 필요한 마음을 자신의 방식대로 불러내면 된다. 당신이 당신의 창조주이니까.

자유로움이 필요한가? 자유로움의 심상이 바람이라면 바람처럼 걸어보라. 당당함이 필요한가? 당당하게 서 있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보라. 나무의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무처럼 웃어본다. ‘그냥’ 움직이다 보면 ‘그냥 그렇게’ 된다. 

내 몸의 움직임을 통해 흐르기 시작한 기운이 내 마음자리에서 나만의 느낌으로 피어날 때 ‘지금! 내 존재가 변했다’라고 인정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듯, 그 멋진 순간을 내 몸을 통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럼 창조주로서 그 모든 것을 창조해 내기에 유리한 몸 상태를 만드는 방법이 있을까? 있다. 그건 다음 시간에! 


글_권나라
건축학을 전공하고, 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브레인트레이너로서 유튜브에서 명상 채널을 운영하며, 명상 상품을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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