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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떠났다. 대학을 중퇴하고 스무 살에 애플을 창업해 개인 PC 시대를 연 실리콘 밸리의 신화. 그는 처음부터 여느 기업인들과 달랐다. 우주를 놀라게 할 만한 대단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고, 시장조사보다는 직관으로 제품을 개발한 예술가적 마인드가 다분했다. 인류 삶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의 창조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선 사상에서 직관력의 씨앗을 발견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서양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선 수행과 명상에 관심이 많았던 선불교 신자였다. 그가 고등학생이던 1960년대는 미국 사회에 히피 문화가 한창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는 일찍부터 실리콘 밸리를 서성이면서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는 것과 더불어 히피 문화에도 푹 젖어 살았다.
여자친구 크리스 앤(첫째 딸 리사의 어머니)과 산책을 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밀밭에서 대마초를 피우고 LSD(환각제의 일종)를 하면서 황홀경을 체험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학비가 비싸고 집에서 먼 리드 대학을 다닌 것도 그곳이 미국 히피들의 집합소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마약보다는 선 사상에 빠져들었다.
동양 종교, 특히 선불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바바 람 다스의 《지금 이곳에 존재하라》 같은 영성과 깨달음에 대한 책을 읽은 것은 물론이고, 대학을 중퇴한 후에는 인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열혈 팬이었던 비틀스나 조지 해리슨이 인도에 갔던 것에서도 얼마쯤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잡스는 공식 전기의 저자 월터 아이작슨과의 인터뷰에서 인도에 간 이유가 영적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7개월 동안의 인도 여행을 통해서 영적 스승을 만나지는 못했다. 대신 그의 인생에 일관되게 영향을 미친 정신적인 가치를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아이작슨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지력知力을 사용하지 않아요. 그 대신 그들은 직관력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관력은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보다 수준이 높습니다. 제가 보기에 직관에는 대단히 강력한 힘이 있으며 지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이 깨달음은 제가 일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인도 여행을 통해 서구 사회의 이성적 사고가 지닌 한계를 분명하게 간파했다. 서구 사회에서 중시되는 이성과 논리보다 직관과 직감이 더 삶의 본질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서구 사회의 이성적인 사고는 인간의 본연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후천적으로 학습한 것이며 서구 문명이 이루어낸 훌륭한 성취이기도 합니다. 인도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학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무언가를 터득했는데,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이성 못지않게 가치가 있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관과 경험의 지혜입니다.”
실제로 이 깨달음은 이후의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그는 남은 인생을 선불교에 헌신하겠다는 진지한 고민까지 했다. 물론 그의 친구이자 멘토인 일본인 선승 고분 지노 아토가와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충분히 영적 생활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 그를 만류하긴 했지만(고분의 만류가 없었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CEO 한 명을 잃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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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랑에 깃들인 잡스의 직관력
잡스의 선 사상에 대한 천착은 유별났다. 그는 배운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유의 열성으로 선 사상을 삶에 받아들이려고 했고 그러한 노력은 그의 인성 곳곳에 깊이 뿌리내렸다. 그는 친구들과 마약에 심취하는 대신에 명상 공간을 만들어서 틈나는 대로 명상 수련을 했다.
채식과 절식을 몸으로 실험했고, 만트라(반복해서 외우는 주문)를 외우면서 삶에 필요한 정신적 가치들을 정제해 나갔다. 이러한 영적 수행이 애플의 혁신적인 제품 개발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는 <비즈니스 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만트라 가운데 하나는 집중과 단순함입니다. 단순함은 복잡한 것보다 어렵습니다. 생각을 명확하고 단순하게 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일단 생각을 명확하고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면 당신은 산도 옮길 수 있을 테니까요.”
잡스는 제품 개발에서 직관에 의한 통찰을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그는 자질구레한 시장 조사를 믿지 않았다. 대중의 요구를 지나치게 참고하면 상상력이 제한되고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할 때 시장 조사를 했을까요? 사람들은 우리가 그것을 눈앞에 내놓기 전까지는 자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릅니다.”
잡스는 이처럼 보이는 수요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애썼다. 컴퓨터가 큰 기업에서만 사용하는 무겁고 둔중한 기계였을 때 애플 컴퓨터를 제작해 개인 PC 시대를 열었고, 픽사를 사들여 3D 애니메이션의 판도를 바꾼 것은 물론, 아이팟과 아이튠즈로 전 세계 음악 시장을 재편하고 아이폰, 아이패드로 패블릿 PC 시장까지 열어간 행보를 보면 그가 움직인 것은 고작 ‘산’ 정도가 아닌 것 같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원초적인 힘은 바로 직관력에서 나왔다. 그는 직관이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직관에 따를 때 독창적이고 참신한 생각들이 발현된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성과 논리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했다.
때로는 그런 선택이 치명적인 실수로 드러나기도 했다. 때로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모습으로 비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실패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한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여러분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도그마, 즉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러분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경영뿐만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죽기 7개월 전, 그러니까 결혼 20주년을 맞는 자리에서 그는 아내를 만난 것도 직관에 이끌려서라고 고백했다.
1989년 가을,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평소 1~2천 명의 청중 앞에서 한 시간 동안 즉흥연설을 하는 게 주특기인 이 사람이 그날은 어쩐 일인지 자꾸 말을 더듬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객석에 앉은 한 여자에게 반한 것이다. 그의 시선은 총명하고 야무진 인상의 금발머리 아가씨에게 ‘꽂혀’ 있었다. 후에 잡스는 그 순간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남은 인생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잡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름을 물었다. 로렌 파월.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었으나 이미 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연락처만 교환하고 얼른 주차장으로 빠져나가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만약 오늘이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면 회의나 하면서 이 밤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저 여자와 함께 보낼 것인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 길로 주차장을 가로질러 뛰어나가 강연장을 막 빠져나가는 로렌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다면 오늘 저녁, 같이 할래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좋아요.”
그 이후로 두 사람은 20년 동안을 줄곧 함께했다. 이 일화에서도 잡스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날 일정을 예정대로 소화하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데이트 약속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삶의 매 순간에 깨어 있기를 원했고, 직관이 이끄는 삶에 우선순위를 두고자 했다.
늘 있는 회의를 무사히 마치는 것보다 지금 여기, 가슴을 뛰게 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열일곱 살 때부터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이렇게 자문했다고 한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오늘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만약 ‘아니오’라는 대답이 여러 날 계속되면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걸 깨닫는다고 했다. 생은 한 번뿐이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을 생을 가장 잘 살아가는 방식을 잡스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이성과 논리, 의무와 필요를 기준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순간순간 자신의 직관의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었다.
직관이 이끄는 삶이야말로 온전한 자신의 삶이다
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은 방황하고 실패했던 순간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닌 줄 알면서도 상황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행했던 일들, 가슴 뛰는 것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실패할까봐 외면했던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가장 뼈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 뇌는 답이 빤히 보이는 안전한 삶보다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 삶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가슴 뛰는 일을 선택했을 때 전기를 맞은 것처럼 시냅스가 활성화되고 뉴런이 반짝인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도전 속으로 목숨 걸고 뛰어들 때 생의 빛나는 이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일 것이다.
혁신적인 제품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꾼 스티브 잡스의 경영자적 업적보다 온전히 깨어 있는 삶을 살고자 했던 그의 삶의 태도가 더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일상에 매몰되어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면, 오랫동안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면, 이제 직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그 목소리는 처음엔 너무 생경해서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외면해온 탓에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까지 한참을 텅 빈 고요 속을 서성이거나 엄청난 소음 속에서 헤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삶 속으로 한 발을 내딛게 될 테니까.
마지막으로 스티브 잡스가 직관에 귀 기울였던 아주 단순한 방식을 소개한다. 명상에 익숙한 <브레인>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산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잠재우려고 애쓰면 더욱 더 산란해질 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음속 불안의 파도는 점차 잦아들고, 그러면 보다 미묘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는 여백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때 우리의 직관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보며 현재에 충실하게 됩니다.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고 현재의 순간이 한없이 확장되는 게 느껴집니다. 또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는 밝은 눈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수양이며,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글·전채연 ccyy74@naver.com | 일러스트레이션·류주영 ryu.joo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