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黃喜)는 세종과 함께 조선의 기틀을 닦은 명재상으로 이름났다. 태종의 신임을 얻어 비서실장격인 지신사(知申事)로 태종을 긴밀히 보좌했으나 세자 양녕을 폐하는 것을 반대하여 남원으로 귀양을 갔다. 그 뒤 태종이 다시 불러 세종에게 임용해 쓰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성군 세종과 명재상 황희가 조선의 새 시대를 열어갔다.
황희는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모든 방면의 정사를 빈틈없이 처리해 세종이 그를 심복처럼 의지했다. 그리하여 황희는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여 개혁의 완급을 조절했고, 4군6진 개척을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하여 '해동요순'이라 일컬어질 만큼 찬란한 시대를 성군 세종과 함께 꽃피웠다.
조선 왕조 최장수 영의정으로서 정치, 경제, 국방, 외교, 법률, 종교, 예술 등 전 방위로 활약하며 조선의 벼리를 세운 명재상 황희의 생애를 담은 '방촌 황희 평전'이 민음사에서 나왔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저자.
▲ 이성무 저 '방촌 황희 평전'.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년)에 태어나 1452년(문종 2년)에 죽었으니, 고려-조선 교체기, 원-명 교체기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즉위한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에 보임된 황희는 새 왕조가 들어선 후에도 태조에게 유능함을 인정받아 세자 우정자에 임명되어 벼슬살이를 이어갔다.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둔한 사람들과 함께하려 했으나 그들이 만류하며 천거해 벼슬길에 다시 나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책은 몇몇 일화로만 알려진 황희의 실제 삶과 공적을 역사적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한다. 56년 관직 생활 동안 24년간 재상을 맡았고 그 가운데 18년 동안 줄곧 영의정 자리를 지키면서 새 왕조의 기틀을 다져 나간 황희. 이 책은 황희가 다방면에 거쳐 이루어낸 크고 작은 업적과 더불어 뇌물 의혹, 사위와 아들 행실 문제 등 그가 남긴 오점까지 황희의 전 면모를 두루 살폈다. 책을 읽어 가면 황희의 진면목을 접하게 된다. 우유부단하고 인자한 청백리 황희는 잘못 전해진 모습이다. 능력 있고 경험 많은 '행정의 달인이자 외교의 사전'이 황희의 진짜 모습이다. 황희는 의례상정소 도제조로서 조선 왕조의 예약 제도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고, 영의정에 올라서는 조선의 정무를 통괄하여 특히 4군6진 개척을 배후에서 지휘해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한번 보면 잊지 않는 특출한 기억력으로 옛일을 두루 알아 예조 판서 시설에는 고려와 중국의 국가 제사 제도를 상고해 조선 고유의 제도로 정착시켰으며, 외교에서는 이러한 능력을 발휘해 명나라와의 미묘한 문제를 원만하게 처리해냈다.
그러나 재상으로 24년, 영의정으로 18년을 재직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만큼 불미스런 일에 여러 번 연루되기도 했다. 홍유룡의 첩을 노비로 삼기도 했고, 남원 부사에게 안롱을 뇌물로 받기도 했으며, 자신과 친한 안숭의 아들 안숭신을 특채했다. 또 제주 감목관으로서 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벌을 받게 된 태석균을 잘 봐주라고 압력을 넣었다가 파면되기도 했다.
대사헌 시절에는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 대사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위 서달이 아전을 죽인 일이 발생하자 황희가 맹사성 등 여러 사람에게 청탁해 서달을 면죄받게 하려고 한 일이 들통 나기도 했다. 이 일로 황희뿐 아니라 맹사성, 신개 등 일에 관련된 사람이 모두 파면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종을 다시 황의를 좌의정에, 맹사성을 우의정에 임명해 일을 맡겼다. 이러한 모습은 그간 널리 알려진 '청백리' 황희와는 너무나 먼 모습이다. 당대에서 황희는 지나치게 관대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했고 청렴결백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태종과 세종은 황희를 중용했다. 세종은 황희를 두고 "경은 세상을 도운 큰 재목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그릇이다. 지혜는 일만 가지 정무(政務)를 통괄하기에 넉넉하고, 덕은 모든 관료를 진정시키기에 넉넉하도다.”라고 칭찬하며 그의 국무 총괄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세종이 ‘진실로 국가의 주춧돌이며, 자신의 고굉(股肱)이다’고 한 황희. 격동기를 살아간 황희를 다룬 평전을 급변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시대의 인재상을 생각하게 한다. 이 시대의 황희는 누구일까.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사진.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