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 한 명의 첩보원이 대한민국 안방극장을 흔들었다. 총과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첩보원들과 달리 화학이나 물리학 지식을 활용한 기발한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첩보원 맥가이버는, 이제 손재주가 좋은 사람을 ‘맥가이버’에 비유할 만큼 일반 명사가 되었다.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유영만 교수의 <브리꼴레르>는 맥가이버처럼 다양한 시도 끝에 해결책을 찾아내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인재상을 제시한다.
브리꼴레르, 발음도 어려운 이 단어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관찰하면서 쓴 <야생의 사고>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브리꼴레르'는 보잘것없는 판자 조각, 돌멩이, 못쓰게 된 톱이나 망치를 가지고 쓸 만한 집 한 채를 거뜬히 짓는다고 레비 스트로스는 말했다. 이들은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해서 실력을 쌓은 전문가라기보다는 체험을 통해 안목과 노하우를 터득한 실전형 전문가이다.

▲ 유영만 교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용접공으로 일하다 우연히 '사법고시 합격 수기'집을 읽고 대학입학을 결심했다. 이후 한양대학교 사범대학교 교육공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교육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학습체제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고, 삼성경제연구소와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경영혁신과 지식경영에 대한 교육을 담당했다. 현재는 한양대학교 사범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유영만 교수는 최근 <브리꼴레르>를 통해 우리 사회의 잘못된 지식인을 비판했다. 그가 말하는 브리꼴레르는 누구나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늘 그렇듯 타고난 사람만이 가능한 것인가, 궁금증을 안고 지난 5월 31일 유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브리꼴레르>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책인지 말하려면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을 설명해야겠네요. 첫 번째는 전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습니다. 전문가는 과연 진짜 전문가일까, 진짜 전문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전문성에 대한 분야별 논의들이 많이 이루어져 왔는데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전문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했습니다.
책에도 언급했지만, 전문가들의 4가지 문제, 가장 간단하게 얘기하면 싹수없는 전문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머리는 샤프하지만, 남을 배려하지 않고, 가슴이 따뜻하지 않은 이런 전문가들이 대량 양산되고 있죠. 브리꼴레르는 고 정주영 회장이나 맥가이버처럼 몸을 움직여서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체험으로 깨닫는 실천적 지식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책상에 앉아 요리조리 머리 굴리는 북 스마트(Book Smarter)가 아닌 길거리에 나가서 넘어지고 자빠지는 스트리트 스마트(Street Smarter)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이 온실 속의 화초를 재배해 비닐하우스 없는 환경에선 얼어 죽게 만드는 나약한 인재를 길러 내는 것이 아닌지 고민 끝에 브리꼴레르를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유영만 교수는 책에서 오늘날 전문가의 4가지 문제로 기존 제도와 절차만 따르며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멍청한 전문가', 자기 분야 외에는 소통하지 않으려는 '답답한 전문가', 자신의 전문성을 훨씬 과장해서 대중의 이목을 끌려는 '사이비 전문가', 다름을 틀림으로 착각해 상대를 무시하는 '안하무인형 재수 없는 전문가'를 꼽았다.
한 분야의 전문가를 넘어 융합형 인재가 되라는 말인가요? 지금 하나도 제대로 못 한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브리꼴레르가 되는 첫 번째 방법이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우물을 파서 깊은 우물의 맛을 봐야 압니다. 문제는 내가 모든 분야의 능통한 전문가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능통은 불가능하지만 소통은 가능하죠. 내가 전공하지 않은 분야의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지금까지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이 보잘것없는 지식이 될 수도 있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 파다가 저것 파다가 여기저기 집적거리고 왔다 갔다가 좌절하니깐 아파도 괜찮다고는 사회적 화두가 나온 거죠. 저는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픔으로 견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통제 먹으면 일시적 치료가 되죠. 그러나 치료는 해주지 않습니다. 아픔을 치료하려면 다른 아픔으로 치료해야 한다. 이것이 스트리트 스마트죠.
누구나 브리꼴레르가 될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브리꼴레르가 될 수 있을까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선 아이들을 키우는 교육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의존적인 아이가 아닌 독립적인 아이를 키워야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옆에서 거드는 정도로 관여해야 하고요.
그리고 스스로 풍부하고 다양한 깊은 체험을 해봐야 합니다. ‘히말라야에 가고 싶은데...’ 앉아서 고민하는 게 아니라 가고 싶으면 가는 겁니다. 직접 체험하면 다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시간 없다는 핑계 대신 분야를 가리지 않는 독서와 영화감상 등 지적자극을 스스로 주어야 합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서 탐구해 나가는 것이죠. 매일같이 정보가 엄청나게 쏟아집니다. 한 가지 주제를 잡고 정보 편집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열정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오디오 비디오 이미지 메시지 등 각종 정보를 찾아보세요. 유튜브 가서 찾아보고, 논문 찾아보고, 계속 읽어보면서 큰 주제를 가지고 편집해 가는 연습을 하다 보면 자신만의 정체성이 생겨납니다.

▲ 유영만 교수
최근 그 어느 때보다 융합이 대세다. 오늘날 세상이 요구하는 인재상의 핵심 자질은 단연코 융합이다. 융합형 인재를 기르기 위해 이공계생에게 철학을 가르치라는 목소리가 높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인재보다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새로운 인재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과연 이공계생에게 시를, 인문계생에게 수학공식을 가르친다고 융합인재가 탄생할 수 있을까는 의문스럽다.
유영만 교수는 융합하되 중심을 잡고 한 우물을 파야 한다며 시종일관 강경했다. 한편으로 공고를 나와 용접공으로 일하다 대학에 진학, 미국유학, 대기업 회사원, 대학교수까지 누구보다 파란만장하게 세상을 살아왔기에 당당하게 ‘스트리트 스마트’를 주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전은애 기자 hspmaker@gmail.com l 사진. 이수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