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난히 한파가 길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가장 추웠던 겨울은 필경 서기 1636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였을 것이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조는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하지만 9년 뒤, 후금은 청나라로 개명하면서 또다시 조선에게는 ‘군신관계’로 격상을 요구한다. 이에 조선은 ‘더 이상 오랑캐에게 치욕을 당할 수는 없다.’며 거부함으로써 조선과 청나라의 전면전이 터지게 된다.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다.’고 명나라에 사대하던 조선은 더 이상 줄타기 외교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제16대 국왕 인조(仁祖)는 청나라에 항거하여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한다. 그러나 강화도 피신불가, 근왕군 패배, 가혹한 맹추위, 식량 부족, 군사력의 압도적인 격차 등등의 압박이 커지며 항복할 마음을 굳힌다.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에게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아홉 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고두’로 항복의 예를 올린다. 이로써 조선의 항복은 공식화된다. 삼전도는 조선 시대에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터이다.
지금의 삼전동 자리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고, 한양과 부리도(현, 잠실)을 연결하는 섬이 아닌 나루터로 조선 시대 수도권 교통의 요지였다. 현재는 554.5m로 우리나라의 가장 높은 빌딩인 롯데월드타워가 있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의 서호 근처이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장기전임에 비해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초부터 다음해 1월 말까지 단 두 달만의 단기전으로 전광석화처럼 끝나버린다. 인조가 무릎 끓고 절을 올린 청나라의 제2대 황제 태종 ‘홍타이지’는 과감하고도 치밀한 리더였다.
‘태종’이란 시호는 대개 ‘태조’의 개국으로 혼란한 국, 내외 정세를 안정시키고 발전의 기틀을 잡은 왕에게 붙여 주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 ‘홍타이지’는 명나라와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배후의 후환이 될 ‘조선’을 먼저 지워버리려고 정묘, 병자호란을 벌린 것이다.
압록강이 얼자마자 침입한 청나라의 강포한 기세에 밀려 한줌의 남한산성에 갇혀 저항하던 조선의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은 마침내 삼전도에 끓어 앉게 된다. 조선의 518년 역사상 초유의 비극이 된다.
청나라의 근간은 여진족이다. 여진족은 명나라에 기대어 소 중화를 자칭하며 헛기침 하는 조선지도층이 멸시하던 종족이었다. ‘서애 유성룡’조차도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오랫동안 조선에 의탁해 살아온 자식”이라고 적고 있다.
1395년과 1404년, 여진족의 추장 ‘퉁밍거 티무르(童猛哥帖木兒)’가 태조 이성계와 태종에게 조공을 바치러 한양을 다녀간다. 조선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하여 ‘오도리 상만호’라는 직책을 주며 다독인다.
‘퉁밍거 티무르’는 바로 병자호란의 청 태종의 직계 조상이다. 일개 여진족장에서 몸을 일으켜 바야흐로 중원을 차지하여 대제국의 주인이 되려는 청 태종은 명나라를 국진하게 사대하는 조선을 늘 ‘후방의 적’으로 여겼다.
1627년, 온갖 트집 끝에 정묘호란을 일으켜 형제 국으로서 조약을 맺고 ‘형이 되어 너그럽게’ 물러갔다. 그러나 언필칭 ‘너그러운 형’인 청 태종은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고치라고 조선을 겁박해온 것이다.
세폐도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 3만 명까지 늘릴 것을 요구한다. 국력도 부족하거니와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수물자들임에 조선은 허락할 수 없었고 결국 병자호란을 당하고 만다.
유난히 추웠던 병자년 겨울,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은 척화파와 주화파의 목숨을 건 갈등이 지리 하게 이어진다. 날도 냉혹하게 춥고 식량도 떨어지고, 산 아래에서 성안으로 시도 때도 없이 쏘아대는 청군의 홍의포의 위력에 놀라 결국 항복문서가 오간다.
문서가 몇 번씩이고 오가며 알량한 체면을 위해 시간을 버리는 동안 성안의 군사와 백성들은 속절없이 얼어 죽고, 굶어 죽고, 포탄 맞아 죽어나갔다. 무수한 시신이 시구문으로 버려져 쌓이고 성 밖의 백성들은 청군의 사냥감이 되고 있었다.
청 태종은 궁지에 몰린 조선의 국왕 인조를 겁박하며 꾸짖는다. “정묘년의 치욕을 갚겠다면서 왜 성으로 숨느냐? 너희를 쳐서 명나라가 어찌 하나 보겠다. 이 조그만 성을 취하지 못한다면 짐이 장차 어떻게 중국 본토로 내려갈 수 있겠느냐? 강력하게 몰아치는 청 태종의 협박에 대한 인조의 떨리는 대답이 낮게 전해진다.
“명나라는 우리와는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항복하면 정말 살려주시는 겁니까? (청나라)황제 폐하가 용서하셔도 조선 백성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비 오니 저의 피맺힌 정성을 보아서라도 살려 주십시오.” 하찮은 오랑캐라고 경멸하면서 교만했던 조선의 왕과 조정으로써는 더없이 애달프고 구차하고 비굴한 처지가 되었다.
1950년, 중국 공산당은 북한을 도와 미국에 항거하며 우리를 침략하는 소위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을 일으키니 우리는 지금껏 세계유일의 분단국이 된다. 동시에 모택동은 서쪽의 티베트를 침공하여 완전히 복속시켰다.
‘전란(戰亂)’의 ‘전’은 외국과의 전쟁이고 ‘란’은 동족간의 싸움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동란 등은 같은 동족간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우리의 역사의 기본인식이다. 2025년 12월 30일, 북한은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올해 1월,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에 영토·영해·영공 조항을 신설해 주권 행사 영역을 명시하고, 통일 관련 표현을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한다.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 압송하여 미국의 법정에 세웠다. 오기, 자존심, 비굴, 간교함으로 나라를 이어갈 수는 없는 법이며 우리는 참혹한 역사를 더 이상 대물림할 수는 없다.
결국은 ‘부국강병’과 ‘인류평화’ 의식의 확대가 열쇠이다. 우리에게 부국강병과 인류평화는 다른 말이 아니다. 어떠한 전략을 어떻게 세워 부강한 나라와 평화로운 지구촌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나와 우리를 지키고 세계와 모두에게 이바지 할 것인가. 역사를 깊이 통찰하고 합심하여 밝은 미래를 확보해야만 한다.
글. 원암 장영주. 사)국학원 상임고문,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