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이면서도 치밀한 논리가 부여된 심플한 디자인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아트 디렉터로 꼽히는 한명수 이사. 비유학파인 그는 우리나라 디자인계 최초의 억대 연봉자로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그의 이름은 일찌감치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사무실은 그의 명성이나 직함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아성이 아니었다. 가벼운 음악이 흐르고 각종 디자인 시안과 결과물들, 재미난 소품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손으로 그린 스케줄 보드조차 작품처럼 보이는 그의 방은 주인을 닮아 즐겁고 유쾌한 공간이었다. 디자인을 창조하는 작업과 경영 관리라는 두 가지 일을 분열 없이 하나로 이끌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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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수 SK커뮤니케이션즈 UI 디자인실 이사 |
브레인 이사님의 현재 업무는 어떤 것입니까?
디자인과 경영 둘 다, 또는 그 둘을 섞는 일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 회사는 사이월드, 네이트닷컴, 엠파스를 비롯해 여러 가지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일을 합니다. UI 디자인실은 화면에 나타나는 작은 디자인에서부터, 어떻게 브랜드를 사람들에게 알릴까 하는 마케팅까지 굉장히 복합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작업의 밑받침이 되는 크리에이티브의 원칙과 방향성을 정하는 일부터 책임지죠. 내부적으로는 130명의 직원들이 할 일을 명확하게 나누고, 한편으로는 서로 협업하는 시스템을 지원합니다. 외부적으로 다른 사업부문들과 발맞춰서 일을 진행하는 조정 역할도 합니다. 규모가 작은 회사에서 일할 때는 아트 디렉팅만 하면 됐는데, 여기서는 매니지먼트라는 혹이 하나 더 붙은 거죠.(웃음)
대기업이라는 환경이 디자이너로서 만족스럽습니까?
큰 조직에 들어와서 당혹스러움을 겪기도 했고, 많이 배우기도 했습니다. 작은 조직은 육체적으로는 엄청 힘들지만 굉장히 재미있죠.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들어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성취감이 큽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렇게 일하면 프로젝트의 맛이 좋죠. 작업에 내 인성이 녹아드는 건데, 그렇게 하는 게 정성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작은 조직에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는 않죠. 큰 조직의 시스템 속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시스템이라면 일을 하는 체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즐겁게 일하면서 생산성을 올리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디자인 회사는 25~30명이 적절한데, 그 규모 정도면 구성원들이 무리해서 일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죠. 지루한 일과 재미있는 일을 교대로 하면서 돈이 되는 일과 재미있는 스낵 프로젝트를 공존시킬 수 있어요.
그런 시스템을 행복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작년 1월 이곳에 처음 들어올 때는 내심 주 업무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에 주력하고 조직 관리, 예산, 경영 시스템 같은 것은 다른 사람이 도와주길 바랐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그런 업무들이 모두 하나로 돌아가더군요. 지금은 나름대로 회사의 시스템을 이해한 상태에서 좀 더 창의적인 매니지먼트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창의적인 매니지먼트란 어떤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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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팀원들이 파트의 장한테 검사를 받고, 그걸 팀장한테 또 보여준 다음, 팀장들이 이사인 내게 최종 결과물을 가지고 오는 조직의 룰을 깼습니다. 각자의 작업 결과물들을 모두 벽에 붙여 노출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내가 아침 일찍 와서 한바퀴 돌면서 보고 나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고, 메신저로 각자에게 쪽지를 보내 평가해주죠. 저는 팀장들하고만 만나고 싶지 않았고 1 대 130으로 통하고 싶었습니다. 거칠지만 솔직하고 살아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원한 거죠. 이런 방식에 당황하는 중간 관리자들도 있었지만 1년쯤 지나니 이해하더군요. 팀원들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파격적으로 의사결정 구조를 바꾼 이유는 무엇입니까?
좀 더 말랑말랑한 문화를 만들려고 한 거였어요. 지루하고 딱딱하게 일했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그 결과물이 고객에게 주는 정서는 지루함이거든요. 아무리 예쁘고 멋있어도 생명력이 없죠. 우리 스스로 즐겁게 일하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직원들이 이메일이나 메신저 같은 온라인을 사용하는 방법들도 하나하나 바꿨습니다. 일을 할 때 조금 더 재미있도록 환경을 만들고,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하죠. 일을 보고할 때도 ‘내가 이렇게 즐기고 있는데 한번 봐줄래?’라는 식으로 하면 즐겁잖아요. 물론 제대로 즐거우려면 공부도 해야 하고, 기술도 좋아야 합니다. 고도의 전문성이 있어야만 자신 있게 놀 수 있죠.
관리 스타일도 이사님의 작업과 닮은 것 같습니다.
매니지먼트와 디자인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니지먼트도 사람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예로 들면, 보통 이 가이드라인을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면 이것에 따라 디자인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죠. 나는 아예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말라고, 깨보라고 해요. 규칙을 만들지만 바로바로 깰 수 있도록 직원들한테 용기를 줍니다. 예전에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얽매여서 성장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어요. 그러다가 그것을 깨면서 쾌감을 느꼈죠.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이것을 또 하나의 기초로 만들면 되잖아’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경험을 직원들과 공유하고 싶어요.
가이드라인이나 규칙 같은 것들이 필요한 부분도 있지 않습니까?
지키지도 않고, 지키지도 못할 어려운 것을 만들 바에야 재미있고 지킬 수 있는 말랑말랑한 것들을 만드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대기업의 가이드라인 작업을 많이 했는데 대부분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지금 회사에도 9개월이나 걸려 만든 가이드라인이 있었어요. 역시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이드라인을 좀 더 창의적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가이드라인을 그림책처럼, 동화책처럼 만들면 어떨까’, ‘한 달에 한 번씩 업그레이드해서 실패작들을 많이 넣는 것은?’, ‘이렇게 해라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실패한다는 식이면 어떨까?’ 이런 생각 끝에 실제로 재미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어요. 우리끼리 즐기는 과정이 녹아 있으면 가이드라인을 보면서 재미있을 것이고, 좀 더 잘해야지 하는 용기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한명수 스타일이라는 디자인도 인상적이지만 경영 관리 방식도 독특한 것 같습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히 이상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니고, 나는 우리나라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고 굉장히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난 뭔가 창의적인 것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아주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들인데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정성을 기울이면 누구든지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작법이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어요. 매일 그림을 그린다는 게 마른 걸레를 짜내는 것과 같잖아요. 그런데 가끔 보면 날마다 국물이 쭉쭉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알아낸 창작 비법 중의 하나가 전혀 관계없는 명사들을 주워 모으는 겁니다. 바람개비와 형광등처럼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단어를 엮으면 새로운 이야기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어요. ‘뭔가 창의적인 걸 해야지’가 아니라 간단한 실마리를 가지고 새롭게 표현하는 연습을 계속 하다 보면 누구나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남들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저도 모방을 굉장히 많이 하거든요. 겉모습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그 속의 원리나 속성, 작법 아이디어 같은 것들을 베끼는 거죠. 우리 디자이너들에게도 모양을 베끼지 말고, 그렇게 만든 디자이너의 머릿속을 베끼라고 이야기합니다.
발상을 표현하는 방법에서도 특별한 방법이 있으신가요?
스스로 표현의 제약 조건을 만들어놓고 일을 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스폰지’라는 웹 사이트에서 일을 하면서 깨달은 방법이죠. 그 당시는 모뎀을 사용하던 시절이라 지금처럼 멋있는 표현을 다 할 수 없었어요. 표현의 욕구는 큰데, 그것을 실현하기에 제약조건이 굉장히 많았죠. 그때 알았습니다.
창의성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을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제약조건이 많으면 그만큼 표현하고 싶은 욕구들 중에서 최소한만 남기고 나머지를 포기하는 데서 창의성이 나옵니다. 지금도 ‘어떻게 하면 디자인을 잘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진짜 남길 것만 남기고 커뮤니케이션 하면 훨씬 빛날 것’이라고 답합니다.
지난해 말에 발표하신 ‘2008 디자인 트렌드’를 보면 굉장히 다양한 방면의 지식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필요한 지식들을 어떻게 얻으시나요?
전문적인 지식과 일반적인 미디어를 편식하지 않고 보는 편입니다. 전문가가 전문지식만 계속 쌓는 것은 소가 동물 사료만 먹다가 광우병 걸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존경하는 선생님들을 모범 삼아 만화책이든 인문 사회과학 책이든 의도적으로 일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 것들을 일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꾸준히 하죠. 내용도 보고 형식도 보면서 내 관점에서 정리합니다. 그리고 보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스크랩을 했다 두고두고 보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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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디자인 작업뿐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논리적인 면도 확고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논리적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얘기해서 직관이 더 강하죠. 하지만 그 직관을 논리적으로 포장하는 훈련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통해야 하는 사람들 중에는 경영이나 마케팅 일을 하는 논리적인 분들이 많습니다. 먹고 살려면 논리적이어야 했죠.(웃음)
그냥 빨간색 동그라미가 하나 있어도 원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왜 빨간색인지를 명확하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대화가 통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고객에게 내 디자인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주기 위해 논리를 만들어냈죠. 그런데 그러려니까 꽃에다 장식을 하나 더하더라도 이유가 필요했어요. 이유를 달면 구조가 생기고, 논리가 서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 작업을 하더라도 단단한 표현의 질서가 생기죠. 과학적인 논리는 아니지만 철학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또 그것을 쉽게 얘기하는 능력이 지혜고요.
디자인에서도 일에서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언제나 재미있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신다는 평이 많습니다.
한때는 가볍고 유머러스한 것이 콤플렉스였습니다. 저는 남들처럼 멋있고 육중한 작업이 안 나와요. 학생 때도 ‘내 작품은 왜 이렇게 가볍고 유치하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 주위 동료들과 선생님들이 칭찬을 해주시더군요. ‘유쾌해서 좋다’, ‘너무 즐겁다’. 그런 칭찬을 받으니 ‘이게 나의 컴플렉스가 아니라 장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밝을 명자가 들어 있는 내 이름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원래 집에서 병수라고 했다가 나중에 명수로 바꿨다고 들었어요.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주어졌겠지’, ‘밝고 유쾌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일을 하는 데 전반적인 원칙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작년에 입사해서 첫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였습니다. 대부분 제목들이 상반기 전략 분석, 평가 보고, 무슨무슨 로드맵 이런 식인데, 저는 제목을 ‘브랜드 두근두근 쿵쿵’이라고 딱 띄웠어요. 임원들이 웃었죠. 제가 열심히 준비한 내용을 이야기 방식으로 풀면서 그 속에 전략을 녹여 설명했어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죠. “제가 프레젠테이션하는 동안 전략이란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게 중요한 전략이란 걸 잘 아시죠?”라고요. 그때 임원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기분이 좋았어요. 당시에 발표한 내용들은 이후 2개월 사이에 모두 실행됐습니다. 그 프레젠테이션의 제목이 내가 일하는 방식이자 소신이에요. 두근두근, 말랑말랑, 쉽게, 즐겁게.
글·김성진 daniyak@brainmedia.co.kr
사진·김명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