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평교 끝자락 탁 트인 진양호를 끼고 2009년에 개원한 국내 유일 청동기전문박물관(사진=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자부심이 대단했다.
진주에서 만난 시민들은 “산 있지 강 있지 살기 좋지예. 타지 갔다가도 못 살고 도로 온다니까예”라고 말했다.
진주성과 남강, 유등축제 등 볼거리와 즐길 거리도 많다. 하물며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목숨을 던진 논개는 어떠한가?
임진왜란 3대 전투 중의 하나인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과 함께 의로운 역사가 서린 고장이다. 예로부터 ‘북평양 남진주’라고 불렸다고 하니, 옛 서울인 한양과 함께 3대 도시로서 유명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지리학자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택리지'에서 진주를 이렇게 평했다.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고을이며 장수와 정승이 될 만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 땅이 기름지고 또 강과 산의 경치가 좋아 사대부는 넉넉한 살림을 자랑한다.”
좋은 터에 좋은 인재가 나오는 것은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알 수 있는 법. 이러한 진주에서도 단군문화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먼저 국내 유일의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으로 가보자.
▲ 당시 대평리 사람들의 의식주를 주제로 청동기 유물을 전시했다(사진=윤한주 기자)
1만 2천여 점의 청동기 유물
박물관은 대평면 대평리 706-5번지 일원에 자리하고 있다. 대평리(大坪里)란 예부터 깊은 골짜기 안에 맑은 물과 넓은 들이 있어 ‘한들’이나 ‘대들’로 불리었다.
곡식과 채소도 풍부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살기에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 대평리에서 농사짓는 어른신은 “지리산이 있으니깐 태풍이나 장마가 와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 또한 살기 좋은 곳은 이만한 데가 없다고 자랑했다. 후손의 말을 입증하기로 하듯 선조의 풍요로운 삶은 남강댐 수몰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로 드러났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 5년에 걸쳐 16개 기관이 문화재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1만 2천여 점이 나온 것이다. 400동이 넘는 집터와 6곳의 환호, 4천㎡가 넘는 밭, 움집, 다락창고, 무덤 등이 발견됐다. 3천 년 전으로 추정되는 이곳의 유물을 16개 기관으로 나눠서 보관할 것인가? 아니면 한곳으로 모아야할 것인가? 라는 의견이 대립됐다.
▲ 청동기문화박물관 2층 상설전시장이다. 당시 대평리 사람들을 인형으로 만들었다(사진=윤한주 기자)
진주시민들은 후자를 택한다. 고대의 문화유산을 국내외에 알리고 진양호와 남강댐의 휴양환경을 인근의 지리산 관광삼품으로 개발하자는 여론이었다.
수몰지역 주민의 애환을 달래주고 수변테마공원을 비롯한 유물전시관으로 조성하자는 필요성도 제기됐다.
2005년 7월 11일 착공에 들어가서 2008년 6월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명칭이 확정된다. 이듬해 6월 11일 개관에 이르렀다. 그해는 관광객도 풍년이었다. 평일에는 600∼700명, 주말과 휴일에는 2,000여 명의 내·외국인 관람객이 찾았다.
당시 지역언론은 “청동기시대의 다양한 진품 유물과 생활상, 주변 볼거리 등으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라며 “교육적 효과가 크게 부각되면서 산 교육장으로서 인식되고 있다”라고 호평했다.
대평 마을사람들의 스토리 전시 돋보여
▲ 청동기문화박물관 2층 상설전시장이다. 당시의 마을을 조형물로 구성했다.(사진=윤한주 기자)
실제로 현장에 가보니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전시 구성이 돋보였다. 청동기시대의 움집 형태를 딴 모형 출입구로 들어간다.
오른편에 자리한 입체영상관에서 3D안경을 쓰고 자리에 앉아보자. 그러면 남자아이 ‘태평’이랑 여자아이 ‘진주’를 주인공으로 한 3D애니메이션이 상영된다.
태평이는 남강가에 자리했던 마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마을로 발전한 이유로 옥 가공품을 생산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는 당시 옥제품이 다수 발견된 것을 고증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은 2층 전시장에도 있어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단순히 유물을 나열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전시라고 하겠다.
1층의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 벽면에는 당시의 연대가 그림과 함께 설명되고있다. 2층에는 어린이 관람객을 위한 채문토기방이 마련됐고 오른쪽부터 상설전시장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그림이 천장의 농경과 관련된 소머리 모양의 별자리와 함께 절묘한 배치를 이룬다. 항상 자연을 살피고 풍년을 기원했다는 것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일 터.
<삼국유사>에서 환웅이 날씨를 상징하는 풍백, 우사, 운사 등 신하를 데리고 온 것도 결국 사람들이 먹고 사는 농업과 무관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 외 토기와 석기, 옥 등 약 500여 점의 진품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제 야외로 나가보자. 이곳에는 당시의 움집과 토기조형물, 무덤군을 실물크기로 복원했다. 대평이랑 진주네 가족도 포토존으로 만들어서 관람객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야외전시장(사진=윤한주 기자)
마을 입구에는 솟대를 세워놨는데, 이는 고조선부터 이어져 온 문화유산이다. 고인돌, 민무늬토기, 비파형 동검과 함께 청동기 유믈 또한 고조선을 대표한다. 유물의 출토지역이 곧 고조선의 세력범위가 된다.
학계는 고조선은 청동기시대에 해당하고 기원전 10세기라고 본다.
그러나 기원전 25세기 청동기 유적으로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 유적과 전남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 유적 등이 발견되면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기원전 2333년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아무튼 박물관은 진주의 마을유적에 국한한 점이 없지 않다. 이는 고조선과 고구려 등 상고사가 연대에 없다는 점도 그 이유라고 하겠다.
최근에는 하루 관람인원이 40명에 그쳐서 개관 당시의 인파는 어디로 갔나 싶다. 지난해 박물관 운영비 4억 3천만 원에 반해 수익은 1,500만 원에 그친 것으로 알 수 있다.
진주시 관계자는 "폐관을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용역을 통해 변신을 모색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6년 전에 121억을 들여서 만든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의 미래는 다시 한 번 진주시민에 달렸다.
▲ 3천년 전의 움집과 토기조형물, 무덤군을 실물크기로 복원했다. 입구에 돌솟대를 세워놨다(사진=윤한주 기자)
돌아갈 때는 비파형동검을 모형으로 세운 박물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한 시민이 “2시간이나 기다려야한다. 대평삼거리로 가보라”라고 해서 30분을 걸어야 했다. 진주시민들도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에 박물관이 있다는 말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계속)
■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 고조선의 대표유물인 청동검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사진=윤한주 기자)
관람시간은 3월부터 10월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11월부터 다음 해 2월은 1시간 이른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매주 월요일과 신정, 구정, 추석은 휴관한다.
박물관 주변에 식당이 없어 도시락과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입장료는 어른 1000원, 어린이·청소년·군인은 500원이다. 보호자를 동반한 6세 이하 어린이와 65세 이상 어르신 및 국가유공자는 무료다.
교통편 및 자세한 관람안내는 홈페이지(www.jbm.go.kr)를 참조하거나 전화(055-749-2518)로 문의하면 된다.
글. 사진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