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달력을 넘기다 올해의 절반이 훌쩍 지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연초, 다이어리 첫 장에 빼곡하게 적은 ‘아침 6시 기상’, ‘퇴근 후 영어 공부’, ‘10kg 감량’ 같은 야심 찬 계획들은 이미 흐릿해진 지 오래다. 매일 아침 출근길 인파에 떠밀려 회사에 도착하고, 내내 업무에 매달리다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질 뿐이다. 치열하게 버티고 있지만 손에 쥔 결과가 너무 초라해서 자괴감이 밀려온다.
우리는 무기력을 마주하면 먼저 자신을 탓한다. 의지가 약해서, 게을러서 이 모양이라며 스스로 찌르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내내 버텨오던 사람이 겪는 무기력은 대부분 뇌의 배터리 방전이 그 원인이다. 더는 무리라고, 제발 숨 좀 돌리라며 뇌가 쏘아 올린 절박한 구조 신호, 바로 ‘번아웃’이다.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뇌 스스로 신경망을 끊는다
자신의 무기력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보듬기 위해서는 뇌과학이 밝혀낸 흥미롭고도 슬픈 사실 하나를 마주해야 한다. 바로 우리 뇌 속에 살고 있는 ‘미세아교세포(Microglia)’라는 작은 청소부 세포 이야기다. [1]
평소에 이 세포는 아주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일꾼이다. 밤낮으로 뇌 신경망 구석구석을 순찰하며 찌꺼기를 청소하고 병균을 막아낸다. 이밖에 아주 중요한 임무가 하나 더 있다. 우리의 성취감을 자극하는 도파민이 목표 지점까지 쌩쌩 달려갈 수 있도록 뇌의 신경망 도로를 반질반질하게 닦고 보수하는 일이다. 미세아교세포 덕분에 우리는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다.
문제는 감당하기 벅찬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때 발생한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 퇴근 후에도 날아오는 업무 메시지, 당장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고민들. 이런 통제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면, 원시의 기억을 가진 우리 뇌는 이를 ‘목숨이 위태로운 심각한 비상사태’로 받아들인다. 이때가 되면 뇌를 조용히 지키던 청소부 세포는 잔뜩 화가 난 ‘전투 모드’로 돌변한다.
최신 신경과학 연구들은 전투 모드가 된 청소부 세포들이 번아웃에 빠진 뇌에서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2] 극도의 피로와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이성을 잃은 이 세포들은 뇌 조직 전체에 뜨거운 염증을 일으킨다. 그러고는 도파민이 지나다녀야 할 신경망을 가위로 자르듯 싹둑싹둑 끊어버리고 마구 갉아먹기 시작한다.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머릿속에서 의욕을 생산하는 공장은 어떻게든 돌아가려 애를 쓰는데, 의욕을 온몸으로 실어 나를 고속도로가 폭격을 맞은 것처럼 붕괴된 것이다. 길이 완전히 끊겼으니 아무리 “밀린 공부를 해야지!”, “오늘은 꼭 운동을 가야 해!”라고 다짐해도 소용이 없다. 도파민은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책상 앞에 앉기는커녕,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불가능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야 할 일들의 목록만 봐도 숨이 턱 막히는가? 분명 머리로는 당장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몸에는 기운이 없어 무력감만 깊어질 뿐이다. 지금 그저 모든 일을 멈추고,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은 채 쉬고만 싶은가? 그렇다면 이제 자책을 멈추자. 그것은 당신의 의지력이 바닥난 게 아니다. 과부하로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뇌가 최후의 수단으로 메인 스위치를 강제로 내려버린 것이다. 무기력은 알 수 없는 마음의 병이나 나약한 꾀병이 아니다. 폭격 맞은 신경망 때문에 발생한 ‘물리적 부상’이다.
무기력의 실체
무기력이 단지 게으름이 아니라 뇌 신경망이 끊겨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았다면 이제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끊어진 신경망을 복구해 뇌가 의욕을 생산하는 공장을 다시 돌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먼저 자신을 탓하는 것부터 멈춰야 한다. SNS에 넘쳐나는 ‘갓생’ 사는 사람들을 보며 무리한 계획을 세워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게 좋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마라톤을 뛰라고 등 떠밀어봐야 상태만 더 악화된다.
무기력의 실체를 알게 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처 입은 뇌가 스스로 염증을 가라앉히고 신경망을 다시 연결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다. 자신에게 안전하고 평온한 시간을 스스로 허락하는 것, 바로 ‘다정한 수용(Self-Compassion)’이다. [3]
주말 내내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고 자책할 필요는 전혀 없다. 겉보기엔 그저 게으름을 피우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누워 있는 그 시간 동안 뇌는 끊어진 길을 필사적으로 복구하며 다시 힘차게 달릴 준비를 한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그동안 쓰러지지 않고 버틴 게 용한 거지. 정말 애썼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 자신을 스스로 토닥여주자. 다정한 수용이야말로 잔뜩 흥분해 뇌를 공격하던 청소부 세포들을 조용히 진정시키는 유일한 해독제다.
무기력하게 지낸 시간에 대한 인지적 재해석
충분한 휴식과 위로로 뇌의 스트레스를 진정시켰다면, 이제는 끊어진 뇌 신경망을 복구할 차례다. 핵심은 무기력하게 지낸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최근 신경과학과 심리학 분야에서 공통으로 주목하는 개념 중 하나가 ‘인지적 재해석(Cognitive Reappraisal)’이다. 우리가 겪은 부정적인 상황에 이성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뇌에서 실제로 어떤 신경학적 변화가 일어나는지 규명하는 연구 분야다. 다수의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해석할 때 뇌 전두엽 안쪽에 위치한 복내측 전전두피질(vmPFC)이 강하게 활성화한다. [4]
복내측 전전두피질은 상황의 객관적인 가치를 재평가하는 뇌의 핵심 영역이다. 우리가 평범한 경험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이 영역의 신경세포들이 즉각 반응한다. 그 결과, 불안과 공포를 주관하며 뇌를 위축시키던 편도체의 과도한 활동이 억제된다. 이와 동시에 스트레스로 억눌려 있던 보상 회로가 자극을 받으면서, 뇌 신경망 전반에 걸쳐 멈춰 있던 도파민 분비가 정상적으로 재개된다.
“나는 올해 상반기를 완전히 망쳤어”라는 자책을 “나는 상반기 내내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버텼어”라고 바꾸는 행위는 단순한 자기합리화나 일시적인 위로가 아니다. 이는 물리적으로 기능이 저하되었던 뇌 신경망을 복구하는 과정이다.
실패로만 느껴지는 지난 시간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재정의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자격증이나 통장 잔고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만 자신을 증명하려 하곤 한다. 하지만 뇌를 치유하는 진짜 성과는 외적인 수치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실제 일상 속에 있다. 매일 묵묵하게 버텨낸 고단한 시간도 자신이 이룩한 진짜 성과이다. 관점을 바꾸면 자신의 일상에서 이 같은 성과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다정한 수용’이 불러오는 변화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흙 속에 심은 작은 씨앗을 떠올려 보자. 오랜 시간이 지나도 흙 위로는 아무런 싹이 트지 않는다. 성장이 멈춘 것 같고,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작은 씨앗은 어둡고 축축한 흙에 파묻혀 땅속으로 부단히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우리의 시간도 이 씨앗과 정확히 같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성적표나 두둑한 통장 잔고는 없지만, 우리는 결코 멈춰 서 있지 않았다. 평범한 듯 보이는 하루하루를 힘껏 살아냈고, 삶에 더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치열한 성장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스스로 이 경험을 인정하자. 내가 인정하면 뇌도 안도한다.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는 왜곡된 실패의 기록을 과감히 지우고, 그 자리에 생존의 기록을 적어 넣자.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을 자기 방식의 성취로 인정할 때, 또 자신의 어깨를 스스로 감싸안을 때 뇌는 안도감 속에서 복구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올해의 절반을 보내고 하반기를 맞으며 조급한 마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자책하며 자신을 벌하는 데 힘을 소진하지 말고, 방전된 뇌를 복구하는 데 집중하는 편이 더 나은 성과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겪는 멈춤과 눈물은 결코 실패가 아니다. 성장하고 도약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오늘 밤,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아서 깊은 한숨을 쉬며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당신의 뇌에 다정한 인사를 건네보자. “남들이 알아주는 대단한 성과는 없었을지 몰라도, 매순간 무너지지 않고 버텨준 것만으로도 넌 정말 대단해. 고단한 일상을 견뎌내느라 고생 많았어. 지금까지 참 잘해왔고, 정말 고마워.”
우리 뇌는 짐작보다 훨씬 회복력이 강하다. 하반기에는 그 회복하는 힘을 타고 더 기운찬 성장 기록을 남기기를 바란다.
글_조용환
국가공인 브레인트레이너. 뇌과학을 온기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칼럼니스트. 최근 《다정한 뇌과학》을 출간했다.
참고문헌
[1] Wake, H. et al. (2009). Resting Microglia Directly Monitor the Functional State of Synapses In Vivo and Determine the Fate of Ischemic Terminals". Journal of Neuroscience 1 April 2009, 29 (13) 3974-3980
[2] Lehmann ML, et al. (2016). “Social defeat induces depressive-like states and microglial activation without involvement of peripheral macrophages.” J Neuroinflammation. 2016 Aug 31;13(1):224.
[3] Kim, J.J., Parker, S.L., Doty, J.R. et al. (2020). “Neurophysiological and behavioural markers of compassion.” Scientific Reports volume 10, 6789 (2020).
[4] Gross, J. J. (2015). “Emotion Regulation: Current Status and Future Prospects.” Psychological Inquiry, 26(1),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