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늬는 떡국을 몇 그릇이나 먹었누?”
제가 어릴 적 어른들께서는 그렇게 나이를 물어 보셨지요. 떡국 한 그릇에 나이 한 살씩,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서 욕심껏 떡국을 먹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서둘러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그래서 제 딸 한나라를 붙들고 그 아이의 속내를 슬쩍 떠보았습니다.
“한나라가 이제 아홉 살이 되었네. 좋겠다.”
“왜? 한 살 더 먹으면 어른이 되는 거잖아. 난 어른 되는 거 싫어.”
“어른 되면 얼마나 좋아. 네가 하고 싶은 일도 맘껏 할 수 있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엄마 잔소리 안 들어도 되고.”
“어른이 되면 아이들한테 잘해 줘야 되는 거잖아. 힘든 물건이 있어도 어른이 다 들어야 하고.”
초등학교 1학년생의 영악함에 그만 할말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요?
어른스럽게 살아간다는 게 뭔지 일장 훈계를 하려던 말문이 탁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 하지만 나이를 안 먹을 수는 없는 거야.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 어른이 되는 거고. 엄마는 네가 어진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겸손한 어른 말이야.”
“나도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어.”
“아무렴. 너는 그렇게 될 수 있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거 알지? 눈과 마음을 크게 열어 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해. 네가 엄마의 딸이라는 게 자랑스럽구나.”
“정말?”
새해에 아이에게 해 주는 덕담 한마디가 거름이 되어, 그 아이의 꿈과 희망이 더욱 크고 푸르러지기를 기원합니다. 엄마의 말이 실제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모가 자신을 믿어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이의 신념은 강해지고, 그것이 도약의 발판이 될 테니까요. 든든한 말 한마디, 그것은 뇌에도 달콤한 향기를 풍기지요. 꼬물꼬물 뇌가 움직이면서 건강해지도록 보듬고 쓰다듬어 주는 행복한 향기. 반면 쓰디쓰게 내뱉은 독설 한마디는 머리 속에 화살처럼 콕콕 박혀서 뇌를 지치고 황폐하게 만듭니다.
세 치의 혀로 뇌를 살리거나 병들게 만들 수 있다니, 입을 열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돌아보니 그간 수없이 쏟아낸 말들 중 되삼키고 싶은 것들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말을 되삼킬 수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향기로운 말들만 전하도록 입을 열기 전에 거듭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새해에는 다른 이의 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덕담 한마디와 따뜻한 웃음을 나눠 보세요.
엄마, 설날에는 왜 떡국을 먹죠?
가래떡을 한번 만져 봐. 희고 긴데다가 말랑말랑해서 둘이 양쪽 끝을 잡고 잡아당기면 재미난 줄다리기 놀이를 할 수 있겠는걸. 이 긴 가래떡을 먹으면 명이 길어진대. 그리고 흰색은 액운을 물리쳐 주는 색으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흰색을 좋아했단다. 이 가래떡을 비스듬하게 놓고 또각또각 썰면 갸름하고 둥근 떡국떡이 되지.
옛날에는 설날이라고 해서 누구나 떡국을 먹을 수는 없었다고 해. 밥 지어 먹기에도 모자란 쌀로 떡을 해 먹는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 그래서 새해가 되면 동네 부자가 나서서 곡간을 풀어 쌀로 떡을 만들어 이웃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떡국을 끓여 이웃에게 베풀었다는 거야. 왜냐하면 밥을 지어 대접하려면 반찬도 만들어야지, 설거지할 그릇도 많아지지, 번거롭지, 그러다 보면 아낙들은 일을 하느라 그날마저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거든. 그래서 간단하고 맛있는 음식을 끓여 낸 것이 바로 떡국이란다.
그럼,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 사실이에요?
옛날에는 동네 부자가 베푸는 음식조차도 넉넉하지 않아서, 새해가 되어도 떡국 한 그릇 변변하게 먹기가 힘들었단다. 그래서 ‘떡국은 제대로 먹었는지’ 안부를 묻곤 했지. 그런데 그게 마치 새해마다 주고받는 말처럼 되었지 뭐야. 그러다 보니 ‘떡국을 먹어야 나이 한 살 먹는다’는 말이 생긴 거지.
그냥 먹어도 맛있는 떡국을 왜 보기 좋게 꾸미는 걸까?
그래, 떡국만 맛있으면 그만이지 굳이 달걀지단을 얹고 김가루 등을 뿌려서 보기 좋게 하려는 이유가 뭘까 궁금할 거야. 그런데 이런 말이 있단다. ‘때론 형식이 내용을 아름답게 한다’고. 깨지고 못난 그릇에 아무렇게나 담은 음식보다는 예쁜 그릇에 담아 정성껏 꾸며 낸 음식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는 말이지.
그건 음식뿐만이 아니야. 세상 살다 보면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는 형식적인 일들이 많단다. 상대방에게 돈을 건넬 때 봉투에 넣는다거나, 선물을 곱게 포장한다거나, 축하하기 위해 꽃을 선물한다거나 하는 것들도 그렇지. 단지 내용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런 형식을 갖췄을 때 사람살이가 훈훈하고 아름다워진단다.
형식에 치우쳐 내용에 소홀하면 절대 안 될 일이지만, 내용을 아름답게 만드는 형식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면 네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구나.
글│박종례 kuppi88@hanmir.com
여러 해 동안 출판사 편집부에서 기획 마케팅꾼으로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 주책스러우리만치 오지랖이 넓어 남의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고 거들면서 수다를 쏟아낸다. 두 아이들과 종종 요리를 하고 주말이면 이불 위에서 뒹굴뒹굴 함께 뒹구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진행│곽문주 joojoo@powerbrain.co,kr
사진│김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