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노란색에 열광했던 사나이

뇌2003년10월호
2013년 01월 09일 (수) 17:30
조회수15250
인쇄 링크복사 작게 크게
복사되었습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1889)


도시의 한복판에 이렇게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흐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라는 노랫말처럼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정말 불행했을까.

실제로 반 고흐는 일생동안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수많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생전엔 겨우 두 점의 작품을 팔았을 만큼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지 못했다. 또한 가난에서 비롯된 영양결핍과 질병에 늘 시달렸고, 특히 정신질환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더욱이 그가 꿈꾸었던 사랑은 단 한 번도 행복한 결말을 맺을 수 없었으며, 부모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계급과 시대에 충실했던 전형적인 부모에게 그는 늘 골칫거리였다.

이처럼 세속의 눈으로 볼 때 그는 불행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고흐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있는 폭발하는 열정을 가졌다.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서른일곱 살인 1890년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무려 8백75 점의 회화와 1천1백 점의 데생이라는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더욱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스물일곱 살이 다 되어서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얼마나 집중해서 작업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폭발하듯 터진 그의 열정과 집중력은 어디 보통사람들이 쉽게 가질 수 있는 덕목이던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었던 힘, 극단적인 우울과 발작을 넘어섰던 그 힘은 오히려 쫓기듯이 살아 삶이 지루한 현대인들에겐 너무나 부러운 것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렇듯 집중할 수 있는 대상과 열정이 있었기에 오히려 행복했을지 모른다.
 


그가 그림을 찾아내기까지…

고흐는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북쪽, 그루트 준데르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온화한 성격의 평범한 목사였던 아버지와 역시 친절하고 존경받는 여성이었던 어머니 사이의 장남이었다.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던 고흐는 사립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열다섯 살 되던 해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일 년 동안 집에서 지내다가 미술품 거래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의 삼촌 세 명이 화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고흐는 거의 4년간 헤이그의 구필화랑에서 모두가 흡족해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마음껏 그림을 볼 수 있었고, 작가들에 대해 감탄하기도 했다. 스무 살 되던 해 고흐는 구필화랑의 런던지점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영국의 미술잡지에 열광했고, 찰스 디킨스와 조지 엘리어트의 작품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하숙집 딸 외제니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다른 사람과 약혼한 처지였다.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그녀의 약혼 사실을 몰랐던 고흐는 극심하게 좌절하고 런던을 떠난다.

그 후 그는 종교에 열렬히 심취하다가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내 그만두고 벨기에 사람이 경영하는 보리나주의 광산으로 가서 전도활동을 한다. 그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부자들이나 세속적인 기독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 더욱 구원에 이르기 쉽다는 생각을 했고, 남는 옷가지 모두를 광부들에게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전도사로서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면직되고 만다.

고흐는 이때부터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관심을 사랑이나 종교에 투사하려 했던 그의 열망이 이제 그림에 투사되기 시작한다.

농부들의 노동에 열광하다

고흐의 초기 작품에는 이전에 그가 가진 청교도적 열정이 그대로 그림에 반영되었다. 시골에서 성장한 그는 내면 깊숙한 감정의 표현을 들판에서 반복되는 노동에서 찾았다. 그가 농부들의 삶과 노동의 이미지를 담아낸 밀레의 그림에 열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모가 있는 에텐으로 돌아가 화가로서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고흐가 제작한 최초의 완성작은 밀레의 작품을 판화로 옮긴 것이었다. <씨뿌리는 사람>(1881)은 그 중 하나다. 고흐 이전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주제에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강렬하게 담지 않았다.

에텐은 주민 대부분이 가톨릭을 믿는 곳으로 고흐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목회를 했다. 고흐는 평원과 늪지, 가까운 이웃집들을 소재로 한 에텐의 풍경을 그렸다. 습작을 통해 기법을 향상시키기엔 안성맞춤인 조건이었다.

에텐에서 시작한 이런 미술적 발전은 또 한번의 강렬한 사랑으로 중단된다. 과부가 된 사촌 케보스를 열렬히 사랑한 그는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까지 그녀를 따라갔다. 결국 굴욕감만 느끼고 돌아온 그는 그해 후반 헤이그로 옮겨 외사촌인 안톤 마우베에게서 사사받는다. 그는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그 곳에 머물게 된다.








사이프러스가 있는 길과 별 (1890)



약한 사람들에 대한 끝모를 애정


이미 두 번의 사랑에 실패했던 그는 또 그곳에서 매춘을 하며 살아가는 지엔 호르닉이라는 시골여자와 사랑에 빠져 함께 살게 되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고흐에게 슬픔에 잠긴 여성에 대한 공감은 깊고도 깊었다. 그는 <슬픔>이라는 작품에서 비참함에 잠긴 여성의 슬픔을 만지듯 그려내기도 했다.

지엔과 헤어진 후 다시 부모가 있는 누에넨으로 돌아간 고흐는 흙에서 노동하는 인간, 특히 여성에 대한 애정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노동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역할에 관심이 컸는데 이는 힘겹게 일하는 어머니에게서 느낀 강렬한 감정에서 연원했다. 이때 그의 대표작인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이 탄생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등잔불 밑에서 감자를 먹는 이 사람들이 접시에 가져가는 바로 그 손으로 감자를 수확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은 육체노동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음식을 벌었는가에 대해 말한다”고 고흐는 언급했다. 그는 이 작업에 완전히 몰두했다. 인물의 머리와 손, 구도에 대한 많은 습작을 통해 그린 이 그림을 두고 그는 동생 테오에게 “내가 이 사물에 대해 갖고 있는 느낌은 꿈에서도 그대로 되살릴 수 있을 정도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터져 나오는 천재적 영감보다는 매일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그려 뇌에 그것을 각인시킨 후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림의 대상이 된 가족들과 친구가 되어 거의 그 집에서 살다시피 했던 그는 거의 매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뇌 속에 이미 그림을 그렸을 터였다.

한편 그가 농부의 가족들과 어울리게 된 데는 보금자리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다. 농부들의 노동에 열광하는 만큼 또한 자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기 시작했는데 특히 그는 새의 둥지를 많이 그렸다. 생명이 탄생하고 자라나는 그 공간에서 모성의 강한 상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둥지가 있는 정물>(1885)이란 그림을 보면 마치 여성의 자궁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시골 농부의 집을 인간의 둥지라고 부르며 좋아했지만 자신은 평생 동안 가정이라는 둥지를 갖지는 못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얻은 영감

누에넨을 떠나 앤트워프로 온 고흐는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그러나 배우려는 의도는 있었지만 특유의 빠르고 대담한 기법을 포기하지 않아 동료 학생들을 당황스럽게 했고, 고집 센 자존심은 결국 그를 초보자 과정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모욕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두 달 만에 다시 파리로 간 고흐에게 자신의 삶의 또 다른 장이 열리기 시작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림에 색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 궁핍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혼자 남겨진 것에 대한 공포는 더욱 그림으로 모아졌고, 여기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극이 되어 뒤늦게 두드러진 색채주의자가 되었다.

상상력의 상징, 노란색을 주로 쓰다

타는 듯한 해바라기는 고흐의 상징이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꽃들과 함께 그렸지만 독창성과 힘이 넘치는 이후의 작품에는 해바라기만 남게 되었다. 아를에 있던 시절에 고갱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얻은 노란 집도 해바라기 그림으로 장식했다. 고흐 해바라기의 가장 충격적인 독창성은 노란색을 배경으로 해바라기를 그린 데 있다. <열 네송이의 해바라기>(1888)는 해바라기를 이루는 노란색을 바탕색으로도 사용했다. 노란색의 여러 가지 채도만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린 것이다.

노란색은 색채심리적으로 상상력과 기쁨을 나타내는 색이다. 기분의 상승과 부드러움을 드러낸다는 노란색을 주로 사용하던 이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신 발작이 시작되었다.

아를에서 고흐와 고갱은 함께 지내게 된다. 고흐는 고갱과의 관계에 커다란 기대를 품었지만 오래지 않아 불화가 생긴다. 자신을 고흐보다 더 깨인 화가로 여겼던 고갱은 고흐의 조롱을 견딜 수 없었고, 자연에서보다는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리라는 고갱의 압력을 고흐는 자기 작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위협으로 느꼈다. 이러한 위협은 고흐의 뇌를 자극했고 결국 한쪽 귀를 잘라 시골 창녀에게 선물로 주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별이 빛나는 밤 (1889)



극단적인 뇌 질환과의 전쟁

그 뒤 이 끔찍한 발작에서 회복되었지만 고통은 계속되었다. 극심한 우울증과 망상에 시달리다가 탈진 상태에 이르러서는 다시 정신이 맑아지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그의 이런 상태는 아직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자해사건 이후 귀에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은 두 점의 자화상에 담겨 있다. 그중 하나인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1889)은 자신을 성찰하는 느낌이 두드러진다. 자신과 침착하게 다시 대면하고 있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훌륭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새로운 자신감이었고 이후 그가 자살하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4백50여 점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힘 같은 것이다.

1889년 생레미 요양소에서 지내게 된 고흐의 병은 당시 간질로 판명되었다. 그 병은 주기적으로 고흐를 엄습했고 그는 고통과 더불어 박해를 받는다는 망상에 시달렸다. 이런 상태로 하루 3분의 1밖에 일할 수 없었던 고흐가 그토록 많은 작품을 그려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간질은 뇌세포에서의 비정상적인 전기의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발작의 형태는 이상이 발견되는 뇌의 부위에 따라 의식의 변화, 사지의 경련, 언어장애, 신체의 이상감각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고흐의 경우는 의식의 변화나 신체의 이상감각으로 나타났다.

생레미 요양소에서는 밀레와 들라크루아의 복제화도 많이 그렸는데 이런 작업이 그의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작업에서 얻은 안정감 덕분에 그는 회화와의 개인적인 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가 투쟁했던 것은 뇌에 엄습한 질병이었을 것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충격적인 고통이나 슬픔 등을 겪을 때 사람의 뇌에서 세로토닌이란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이 뇌 속에 과다 분비되면 우울증이 심해지고 자살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고흐가 결국 권총자살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러한 질병이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보자면 그가 그림을 그리다 정신 이상이 된 것이 아니라 뇌에 걸린 치명적인 질병에도 불구하고 그 병을 콘트롤하며 그토록 위대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말이 맞게 된다.

노동하는 자들에 대한 경외,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가진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런 병을 견디고 자신의 열망을 표현할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에너지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그의 그림을 보며 행복해 할 수 있다.

글│지은주 ippen@dreamwiz.com

ⓒ 브레인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 뉴스

설명글
인기기사는 최근 7일간 조회수, 댓글수, 호응이 높은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