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현란한 퓨전 시대이다. 판사, 의사, 변호사, 교수 같은 20세기 식 고리타분한 전문가는 이 변화의 시대에 적응하기 어렵다. 여성이야말로 현란한 시대에 재빨리 변신하는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식투자자에서 CEO로, CEO에서 작가로, 작가에서 연예인으로. 이도저도 안 되면 재빨리 가정주부로 돌아와 세상일 모르는 척 살아갈 수도 있는, 그런 유연한 능력을 가진 것이 바로 여성의 뇌이다.
.jpg) 아일랜드 최초의 여성대통령 메리로빈슨의
뒤를 이어 1997년 대통령에 선출된
메리 매컬리스(왼쪽)와
2000년 핀란드 대통령직에 오른 타르야 할로넨 |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1949년 <제 2 의 성>을 쓴 시몬느 드 보봐르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50년이 흘러 1999년 <제 1의 성>을 쓴 헬렌 피셔는 진화론적, 뇌과학적으로 판명된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런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 각각 유리한 길을 찾자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지난 호에 나는 이미 여성의 뇌는 양쪽 뇌를 좀 더 유연하게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는 두꺼워진 뇌량의 크기와 관계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더불어 여성 뇌가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남성보다 감각이 예민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후각, 청각 그리고 촉각이 그렇다. 이처럼 여성의 감각이 예민한 것은 후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아기를 검사해 보아도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 비해 감각이 예민하기 때문이다.
육감이란 것이 무엇인지 과학자들은 정확히 모르지만 이는 분명 여자에게 사용되는 말이다. 아마도 육감이란 여러 종류의 감각이 혼합되어 상승효과를 이루는, 한껏 예민해진 종합 감각이 아닌가 싶다. 캐나다의 위텔슨 교수 팀에 의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측두엽 대뇌피질에서 감각을 받아들이는 과립층 신경 세포의 밀도가 높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이 여성의 예민한 감각을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말초 감각뿐 아니라 복합 감각인 감정 역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예민하다. 인간의 감정은 뇌의 중앙 부위에 회로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 변연계의 활성화에 의한다. 미국 국립보건원의 조지 박사 팀의 연구에 의하면 슬픈 일을 회상하게 했을 때 여성이 남성에 비해 변연계의 혈류가 더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즉 여성의 변연계 역시 남성의 것보다 더 예민한 것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예민해진 이유
이처럼 여성의 감각 혹은 감정이 예민해야 하는 진화론적 이유가 있을까? 아마도 아이를 보살필 때 아기가 보내는 사소한 신호를 주의깊게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주위의 위험을 빨리 감지해야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컨대 남녀가 성행위를 하는 도중에 옆방에서 소리가 나면 여기에 방해를 더 많이 받는 쪽은 여성이라고 한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예민해진 또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남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거짓말 둘러대는 믿지 못할 남자가 많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여성은 온몸의 감각을 돋우어 접근하는 남자의 정체를 파악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예민한 뇌, 그리고 부산한 신경세포의 연결은 한 가지 일에 전문적으로 집중하는 데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여성의 능력을 소리 높여 외치던 페미니스트들은 이 사회에 여성 전문가가 드물다는 사실에 한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뇌의 구조 때문에 여성이 전문가가 되기 힘들다는 견해는 그 근거가 희박하다. 실제로 여성의 사회 진출률이 높아지면서 여성 전문가들이 크게 늘고 있다. 나에게는 오히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가 외친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왜 여자들 중에는 천재가 없는가? 작가, 화가, 작곡가 중에도 여자 천재는 없다. 그 이유는 여자는 자신의 능력을 가족과 남편에게 다 쏟아 넣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헬렌 피셔의 주장대로 여성 뇌의 특징을 고려하여 여성에게 유리한 직업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우선 발달된 후각을 앞세워 요리를 하는 여성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예민한 듣기 능력과 섬세한 발음이 요구되는 언어 분야에서 여성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동시통역, 아나운서, 외국어 선생님 등. 여성의 풍부한 감성은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 방면에 경쟁력을 갖도록 한다. 이중에서도 남성과 전혀 경쟁할 필요가 없는 직업은 아마도 가수나 연예인일 것이다. 그래서 이미자, 마돈나 같은 가수나 김지미, 마릴린 몬로 같은 배우의 위치는 그 어떤 남성보다도 높다. 여성의 예민한 감각, 특히 종합적인 감각은 여성으로 하여금 훌륭한 독자, 그리고 평론가가 되도록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해서 사원을 뽑아야 하는 요즘, 현명한 회사 사장이라면 여성을 고용해서 그녀가 받은 인상을 중요한 정보로 사용할 것이다.
여성의 뇌 특성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직업
여성의 뇌, 그리고 여성이 처한 환경은 여성으로 하여금 전문가가 되는 데 불리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문가들을 종합적으로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쩌면 여성에게는 기능직 사원보다는 CEO가, 전문가보다는 장관이, 그리고 장관보다는 대통령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핀란드 같은 안정된 나라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모두 여성인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다. 여성은 그 특유의 섬세함과 모성 본능으로 전문가들의 생경한 의견들을 조정하고 그들을 리드할 것이다.
게다가 21세기는 현란한 퓨전 시대이다. 판사, 의사, 변호사, 교수 같은 20세기 식 고리타분한 전문가는 이 변화의 시대에 적응하기 어렵다. 여성이야말로 현란한 시대에 재빨리 변신하는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식투자자에서 CEO로, CEO에서 작가로, 작가에서 연예인으로. 이도저도 안 되면 재빨리 가정주부로 돌아와 세상일 모르는 척 살아갈 수도 있는, 그런 유연한 능력을 가진 것이 바로 여성의 뇌이다.
마지막으로 여의사는 어떨까? 내가 보기에 의학은 여성에게 유리한 학문이다. 첫째로 외우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여성은 외우기를 잘한다. 실제로 길을 찾을 때 남성은 공간적 감각을 동원하지만 여성은 골목길에서 본 가게의 이름을 외우는 식으로 찾는 경향이 있다. 둘째로 의학이란 뼈 이름부터 복잡한 생리 공식까지 여러 과목이 융합되는 종합 학문이다. 환자의 진료 역시 환자가 나타내는 수많은 징후를 종합해서 판단하는 짬뽕 기술이다. 그렇다면 뇌가 한꺼번에 작동하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유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은 환자를 따뜻한 인간으로 본다. 따라서 환자의 기분 상태를 파악하고, 이를 다스려 주는 심리 치료를 더욱 잘 할 수 있다. 즉 남자 의사는 병을 치료하지만 여자 의사는 환자를 치료한다는 점에서 더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여의사들은 환자에게 말을 걸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남자 의사에 비해 길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스트레스가 따르는 임상진료 과보다는 임상병리나 방사선과 같은 조용한 ‘서비스 과’를 택해 왔던 여성들은 이제 변해야 한다. 실험실 시약이나 방사선 필름만 쳐다봐서는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는 섬세한 여성 의료인의 이점을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좀 더 과감히 의료의 현장, 진료의 중심으로 진출해야 한다. 하긴 그러지 않아도 요즘 의과대학 학생 비율은 남녀가 반반이다. 여의사가 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얼마 후에는 내과, 소아과, 정신과 같은 곳에서 남자 의사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정형외과, 흉부외과 같은 막노동 과에서나 그나마 남자 의사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글. 김종성 jongskim@amc.seoul.kr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과장. 울산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