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공간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70대 이후 치매나 노화가 시작되면 요양원으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치매 노인이나 나이 드신 부모를 가족이 온전히 부양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역시 언젠가는 그 시간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추세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인지 기능도 떨어지는 상태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집을 떠나 낯선 공간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사자에게는 큰 부담이다.
뇌를 위한 인테리어 ‘뉴로테리어’
《뉴로테리어》를 쓴 손혜주(중앙대 의대 핵의학과) 교수는 이런 이유로 40~50대부터 나이 든 삶을 위한 공간 기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바로 뇌를 위한 인테리어, 뉴로테리어Neuro-terior에 대한 제안이다.
이 아이디어는 스웨덴의 실비아 왕비가 조성한 노인을 위한 주거 시설 실비아보SilviaBo에서 영향을 받았다. 실비아 왕비는 어머니가 치매를 앓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치매 환자가 가족과 떨어져 시설로 옮겨지는 대신 최대한 오래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주거 모델을 고안하였다.
손혜주 교수는 치매를 막연히 두려워하기보다 직접 바꿀 수 있는 환경부터 재구성하는 것으로 대처하라고 제안한다. 우리 일상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는 ‘공간의 힘’을 믿어보라는 말이다.
실제로 뇌는 생각보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젊은 시절에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충분히 담아낸 공간을 꾸미는 일이 중요하지만, 나이가 들면 몸과 뇌의 노화를 끌어안고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효율적인 공간 설계가 필요하다. 결국 필요한 것은 뇌의 나이에 맞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뉴로테리어를 위해 거창한 공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눈부심을 줄인 부드러운 조명, 턱을 없앤 평평한 바닥, 가족을 향해 살짝 각도를 튼 안락의자의 배치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런 사소한 배려만으로도 뇌의 피로가 줄고, 인지 기능의 저하로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사고들을 예방할 수 있다. 시각적 동선을 열어줌으로써 가족과 함께하고 있다는 심리적 안도감을 주는 것은 물론이다.
집은 흐릿해지는 기억을 지탱해줄 ‘두 번째 뇌’
중요한 것은 이런 공간 배치를 이미 인지 장애가 진행되고 있는 60~70대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아직 건강하고 유연한 40~50대부터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인지적 문제가 일어난 상태에서 공간을 재배치하면 거기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반면 40대부터 익숙해진 공간이라면, 뇌는 수천 번도 더 반복한 동선에 적응하여 이후 인지 기능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미 작업 기억으로 저장된 활동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다.
뇌의 나이에 걸맞은 집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정리이다. 젊은 시절의 집이 취향과 감각을 드러내는 곳이었다면, 노화가 시작된 이후의 집은 흐릿해지는 기억과 감각을 지탱해줄 ‘두 번째 뇌’가 되어야 한다.
뇌과학에서는 정리가 인지 부담(cognitive load)을 줄인다는 사실이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물건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계속 찾아야 하는 환경은 뇌를 지치게 한다. 쓰지 않는 물건을 수납하여 집 안을 정리하고, 동선을 단순화해 자주 쓰는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뇌에 불필요한 자극을 줄일 수 있다. 나이 들수록 집은 기억을 대신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물건을 기억하는 대신, 집이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뉴로테리어에서는 후각 또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후각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그리고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커피 향, 익숙한 비누 냄새 같은 것들이 그와 관련된 기억을 불러오고 치매 환자들에게 여기가 내 집이라는 안정감을 준다. 특히 향기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식탁 주변에는 커피 향과 밥 냄새가, 욕실에는 비누 향이, 침실에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편백 향 같은 것을 더하는 식으로, 냄새만으로도 뇌가 공간을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
노안이 오면 조도를 높여야 한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시력이 떨어지고 색깔 대비 감각도 떨어진다. 여기에 인지 기능까지 약해지면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해석하는 데도 오류가 생긴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시선을 섬세하게 그린 소설 《스틸 앨리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앨리스는 현관으로 달려갔지만 현관문에 이르기도 전에 우뚝 멈췄다.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현관문 바로 앞의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의 가로 너비는 복도 전체를 차지했고 세로 길이는 2.5미터쯤 되었으며 구멍 사이로 컴컴한 지하실이 그대로 보였다. 그 구멍을 건너가는 건 불가능했다.’ 치매 환자들은 이처럼 어두운 그림자나 카펫의 검은 무늬를 구덩이로 착각하거나 빛이 반사되는 바닥을 물웅덩이로 오해하기도 한다.
치매가 아니더라도 노안이 오면 젊을 때보다 3~4배나 더 많은 빛이 필요해지기에, 나이가 들수록 조명의 밝기를 점점 높여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75세 성인의 눈은 20세 청년보다 약 3~4배 많은 빛을 필요로 한다. 자녀들이 보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조도도 부모의 시야에서는 침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니 식탁이나 작업대, 거실처럼 활동이 많은 곳은 약 7백 럭스 수준까지 밝기를 유지해주는 것이 좋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카페에서 작업하기를 좋아하는데, 한때 합정역 근처에 있는 한 프랜차이즈 카페를 자주 이용했던 것은 조명 때문이었다. 2층의 바 테이블에는 좌석마다 핀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자리에 앉으면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극 무대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몰입이 되었다. 테이블에 앉으면 주변의 소음이 신기할 만큼 멀어지고 한두 시간은 무리 없이 집중할 수 있었다. 너무 어두운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쨍한 것도 아닌 딱 적당한 밝기의 조명이 몰입감을 더해주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조명은 뇌의 시간을 맞춰주는 시계이자 심리적 불안을 잠재우는 치료제 기능을 한다. 노화된 시력은 전체적으로 시야가 흐리고 대비가 약해진다. 신호등 색을 구분하지 못해 횡단보도 앞에서 망설이게 될 수도 있고, 상한 음식의 색깔을 구분하지 못해 잘못 먹고 탈이 날 수도 있다. 명암의 경계가 흐릿해져 흰 그릇 안의 쌀밥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고, 하얀 타일 위의 하얀 변기를 구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니 내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음식물과 구분되도록 접시를 비비드한 컬러로 바꾸고 하얀 타일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변기 시트를 구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방과 방 사이를 오가는 복도는 지나치게 밝은 색깔로 통일하기보다 바닥을 좀 더 따뜻하고 어두운 브라운 계열로 바꿔 벽과 바닥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 지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안식처, 소파
성공한 CEO의 서재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의 거실에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의자에서 보낸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수록 생활 반경은 점점 줄어들어 도시에서 동네로, 동네에서 집으로, 마침내 의자라는 한 평 남짓한 공간으로 축소된다.
그렇기에 노년기의 의자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다. 밥을 먹고 낮잠을 자며 하루를 보내는 중심 공간이다. 하여 나이가 들수록 몸에 맞는 의자 하나가 절실해진다. 푹 꺼진 시트는 허리 통증을 부르고, 미끄러운 팔걸이는 낙상 사고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아마도 노화에 대비해 내가 가장 먼저 들일 것도 바로 의자일 것이다. 직업상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예전부터 쿠션감 좋은 소파에 집착하는 편이다. 특히 오래 앉아 있어도 엉덩이가 배기지 않는 일인용 소파를 선호한다.
나이가 들어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대부분이 될 때를 대비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하게 될 일은 쿠션감 좋은 소파를 베란다 근처에 배치하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 잘 통하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바깥 구경을 하고, 햇볕을 쬐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 집 창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요양원의 창가와는 다를 것이다.
요양원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적다는 것이다. 햇빛과 바람, 비 오는 날과 낙엽이 떨어지는 날, 지저귀는 새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풍경은 모두 뇌를 자극한다. 창가에 놓인 의자 하나는 단순히 휴식을 취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계절과 시간을 확인하며 내가 아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을 줄 것이다.
뇌에 최적화된 공간이 삶을 더 잘 지탱하게 한다
물론 공간 배치 또한 한 번에 완성되지는 않는다. 마흔 살 후반에 운동을 다시 시작했을 때, 내 의지가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의지를 믿는 대신 운동하기 쉬운 환경을 만드는 실험을 계속했다. 내 경우에는 집 가까운 곳에서, 새벽 시간에, 고민할 필요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운동을 가장 오래도록 꾸준히 하는 방법이었다.
집도 마찬가지다. 강력한 의지보다 뇌에 최적화된 공간이 우리를 더 오래 지탱하게 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마모되어 가는 시력과 청력, 인지 능력을 고려한 사려 깊은 공간이면 충분하다. 그런 공간에서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면, 노화를 질병으로 여기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희망하며 병원을 전전하는 대신, 창가의 소파에 앉아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듯 천천히 삶을 정리하는 노년을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글_전채연
출판 기획자이자 작가. 쓴 책으로 《스님의 호흡법》, 《우리 뇌는 그렇지 않아》, 《휴맥스, 다시 벤처 정신을 말하다》, 《박지성처럼 꿈꿔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