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경험(Museum Experience)’ 중 관계성을 주제로 일 년간 전시를 만들어온 블루메미술관이 올 가을 차갑거나 따뜻한 ‘온도’, 멀고 가까운 ‘거리’의 개념을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를 돌아보는 전시를 연다. 인간의 관계성을 측정 가능한 요소로 읽어보고자 하는 이 전시는 ‘온도는 측정 가능한 것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다룬 《온도계의 철학》이라는 책에서 비롯되었다.
▲ .정성윤, Squares, 2016, steel, motor, plastic, 200x270x90cm, 김승영, 의자, 2011, 오브제, 전기장치, 물, 93×46×48cm.
이 책의 저자인 과학철학자 장하석 교수는 사물의 뜨겁고 차가운 정도를 재고 기록하는 도구가 만들어지기까지 과학의 역사는 매우 주관적인 것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고 수시로 변동되는 ‘혈온(사람의 체온)’을 온도 측정의 고정점으로 사용한 뉴턴을 비롯하여 17~18세기 서양의 과학자들이 제시한 기준점은 ‘첫 번째 밤 서리, 손을 넣고 견딜 수 있는 가장 뜨거운 물, 깊은 지하실’과 같은 것이었다. 이처럼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인간의 감각이 온도 측정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온도를 관계의 언어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온도계라는 객관적 수치와 측정의 도구가 발명되는 데 주관적이라 여겨지는 인간감각이 제1표준이 되었다는 의외의 사실을 두고 이 전시는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 백정기, Untitled, ,2007, C-print,68x101cm (각)
사람 사이의 관계는 측정 가능한 것일까? 맞닿아 있는 살갗의 온도 값으로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가? 그 깊이와 너비를 재어 수치화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관계성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추상적인 상호작용으로서만 존재하는 듯하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관계성을 거리와 온도 같은 측량 가능한 기준점을 가진 요소들을 통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경험치로 가늠해보고 소통해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작은 틈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닿을 듯 말 듯 움직이는 기계장치가 보여주는 위태로운 관계의 거리, 앉으면 인간의 체온과 같은 따뜻한 온도를 느끼게 해주는 철제 의자, 누구와 어떻게 서있느냐에 따라 켜지고 꺼지는 빛과 그 빛의 온도를 전달하는 작품. 이를 통해 이 전시는 측정 불가능한 인간관계에서도 누구나 소통 가능한 고정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 심아빈,Triangle,2016,steel, mirror, artficial lawn, LED light,195x90x70cm.
이번 전시는 ‘한 뼘의 온도 – 관계측정의 미학’라는 제목으로 10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경기도 파주 헤이리 블루메미술관에서 열린다. 김다움, 김승영, 백정기, 심아빈, 정성윤, 리즈닝미디어 작가가 조각, 설치, 사진, 영상 14점을 전시한다.
▲ 리즈닝 미디어, 접점, 2016, LED조명, 프로넬 렌즈, 조명센서컨트롤
정성윤 작가가 만든 기계장치의 계산된 움직임은 예측불가능하고 비가시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관계를 표상한다. 닿을 듯 말 듯 빠르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검은 당구공들, 작은 틈을 사이에 두고 그 틈을 좁혔다 넓혔다 하며 위아래로 떨리듯 움직이고 있는 두 개의 큰 색면 기계장치는 위태로움, 안타까움, 허무함 또는 적당한 안정감 같은 감정으로 공유되는 사람 사이의 관계의 모습들을 떠오르게 한다. 심장 없이 수치로 작동되는 기계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체온을 지닌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거리를 지각하게 된다.
백정기 작가가 만든 기계장치의 출발점이 된 바셀린이라는 재료는 그 틈을 메우고 덮는 행위에 주목하게 한다. 나의 가장 끝부분이자 타인 또는 세상과 만나는 시작점인 피부에 두껍게 바른 바셀린은 나에게 생긴 틈, 상처를 보호하고 치유한다. 보습하는 그것의 물질성은 메마른 땅의 틈, 사람사이 갈등의 환경에 스며들어 흐르는 물의 순환, 회복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나와 너, 나아가 세상의 크고 작은 간극을 메우며 움직이는 에너지, 그 관계의 역학을 회로도와 같은 인과론적인,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가시적 장치들로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 김다움, 상호간접(Mutually Mediated), 2013, 단채널 HD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 10분.
김승영의 빨간 의자는 기억에 관한 것이다. 정성윤의 검은 기계장치와 마주보고 있는 이 낡은 철제의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연상하게 하는데 누군가의 자리로서 관객이 앉을 수 있게 되어있다. 철제의자에 앉는 순간 관객은 놀라게 된다. 의자가 체온에 가까운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김승영의 의자는 추상적으로 떠도는 기억을 붙잡아 앉히며 온도를 지닌 몸이 먼저 지각함으로써 시작되는 모든 관계들을 읽어보게 한다.
심아빈의 작품도 관객이 몸을 움직였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소통된다. 그가 만든 3개의 기둥은 사다리, 거울, 구멍 같은 장치를 통해 관객을 움직이게 만든다. 원기둥은 내려다보고 삼각기둥은 들여다보고 사각기둥은 올려다보도록 유도한다. 이렇게 움직인 관객이 보는 것은 무엇일까?
사다리를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물 속 같은 더 깊은 곳에 놓이게 되고, 머리를 들어 기둥의 윗면을 보겠거니 했는데 오히려 바닥을 보게 된다거나 기둥의 내부를 보려 고개를 집어 넣었는데 내 모습과 맞닥드린다. 공간적인 인과관계가 뒤집히는 것이다. 이처럼 앞뒤, 위아래, 안과 밖 같은 물리적인 위상관계를 뒤집는 관객의 움직임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각기 다른 시공간에 관한 기억 속에서 해석되고 가늠되어지는 인간관계의 거리와 위상을 생각하게 한다.
▲ 정성윤, They Spin Like Nonsense, 2015, steel, aluminum, motor, billiard balls, 21x320x10cm
심아빈 작가의 기하학적 도형기둥들이 부피를 지닌 덩어리로써 관계성의 해석에 관한 하나의 기준점을 제시한다면 리즈닝미디어는 공간을 비우며 부피와 형태가 없는 빛을 통해 비가시적인 상호작용으로서의 관계성을 이야기한다. 전시장 중간에 놓인 11개의 계단은 연결공간으로 이곳을 오르내리는 관객의 발걸음과 생각을 늦춘다. 비어있는 공간과 같은 이 계단의 어느 지점을 지날 때 조명이 켜지며 관객이 선 자리를 비춘다. 조명의 환한 빛은 관객과 관객간의 거리를 드러내고 발열하는 빛은 그 따뜻한 온도를 같이 경험하고 하고 있는 관객들 사이에 접점을 만든다. 한 줄기 빛이 무형의 빈 공간을 한 순간 촉각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관계가 새롭게 조명되고 작고 사소한 계기가 관계망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리즈닝미디어 작가의 빛이 신체적인 공간을 통해 나와 상대의 관계를 경험 가능한 요소로 읽어내게 한다면 김다움은 깜박거리는 빛으로 구성된 가상의 공간, 컴퓨터 화면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의 언어들을 이야기한다. SNS상의 대화창에 짤막한 문구로 오가는 대화는 쌓여가는 것인가 흩어져버리는 것인가. 직접 대면하지 않기에 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얼굴 없이 쌓인 말들로 형성된 관계의 무게는 중력을 거슬러 부유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런 온라인상의 만남과 물리적 공간인 전시장에서의 관계 맺기를 비교하는 작가와 어떤 한 남자의 이야기가 담긴 영상작품에서 화자는 모니터 화면 속으로 들어가며 대화를 시작한다. 화면 안으로 가상의 공간이 펼쳐지는데 그 안에는 실제 공간처럼 질감이 있고 시간에 따른 움직임이 있다. 촉감과 시선의 교환이 있는 실제 만남처럼 인터넷 공간에서의 그것 또한 때로 헐겁고 촘촘하며, 금속 같은 차가운 매끈함과 맞잡은 손의 온기 같은 관계의 질감이 존재함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전시는 마주한 마음과 마음사이의 거리가 눈금자처럼 정확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재어볼 수 있는 한 뼘의 거리를 기준으로 멀고 가까움을 측정해볼 수 있으며 그 너비 사이에 존재하는 뜨겁고 차가운 관계의 온도 값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함께 돌아볼 수 있음을 얘기한다.
■전시개요
전시제목ㅣ한 뼘의 온도 – 관계측정의 미학
전시일정ㅣ2016년 10월 1일(토) - 12월 31일(토)
전시장소ㅣ블루메미술관(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마을길 59-30)
참여작가ㅣ김다움, 김승영, 백정기, 심아빈, 정성윤, 리즈닝미디어 (조각, 설치, 사진, 영상 14점)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사진. 블루메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