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의 섬에서 찾은 단군

보배의 섬에서 찾은 단군

단군문화기획 45편 전라남도 진도 단군전

▲ 철마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진도군 단군전이다. 통일기원국조단군상이 보인다(사진=윤한주 기자)

아침 7시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4시간 만에 목포에 도착했다. 목포서 진도까지 차로 1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그런데 날씨가 걱정이었다. 구름 낀 하늘이 좀처럼 해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도에 도착하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져서 우산을 펼쳤다. 이후 드문드문 왔지만, 취재를 마칠 때까지 장대비는 쏟아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럴 때 ‘단군 할아버지가 보우하사’라며 감사하게 된다.

박재문 단군전숭모회장의 안내를 받았다. 입구서 올라가는 데 계단이 제법 많았다. 금색으로 도색한 통일기원국조단군상이 성전 앞을 지키고 있었다. 홍익문화운동연합이 기증한 것이다.

▲ 전라남도 진도군 단군전 정문의 역할을 하는 개천문(사진=윤한주 기자)

내문은 없고 외문의 역할을 하는 개천문을 지나니 성전이었다. 문을 열자, 단군영정을 모신 제상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단군의 부인을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로 함께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취재한 단군전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제물도 두 분씩 차리고 술잔도 두 분씩 하고 있어요. 개천절에도 잔을 2잔 올리고 있어요. 위패는 5년 정도 됐어요.”

신주는 ‘단군왕후비서갑숭모’라고 씌어 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승휴는『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단군은) 비서갑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부루”라고 밝혔다.

박 회장은 최근에 군의 지원으로 제복과 신발, 천막 등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제례비 100만 원으로 개천절을 지냈다고 한다. 이곳에 외지인은 얼마나 방문할까?

▲ 전라남도 진도군 단군전이다. 1978년 건립됐다.(사진=윤한주 기자)

“매달 오죠. 향교도 보고 성전도 보고 그래요.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도 바닷길(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 사이에서 조수 간만의 차이로 길이 2.8㎞, 폭 40∼60m로 갈라져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자연현상) 열리면 관광하러 왔다가 들립니다.”

단군전의 역사는 대일항쟁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도 유림들은 1922년 단군전 건립을 결의한다. 3.1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민족자존의 단합된 항거의 표상을 단군에서 찾고자 했던 것. 이듬해 봉안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한 씨 성의 비조인 기성만을 봉안했다.

당시 한명이(韓明履, 1886〜1961)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20년 진도운수주식회사 이사를 거쳐 진도군참사를 지내고 전라남도 평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단군전 건립을 위해 1924년 동문 안 옛 향교 터인 자신의 땅을 희사했다.

▲ 전라남도 진도군 단군전 내 단군영정이다. 단군과 부인 비서갑 왕후를 위패로 모신 점이 특징이다(사진=윤한주 기자)

박 회장은 “지금은 폐가가 됐다”라며 “후손들도 뿔뿔이 헤어져서 여기 없다”라고 말했다.

광복되자 단군만을 모시는 성전 건립에 나선다. 1967년 9월 15일 기성회가 결성, 진도향교 서편에 터를 닦아 1978년 6월 3일 단군전을 준공한다. 그해 7월 23일 단군신위와 영정을 봉안했다.

한편 보배의 섬, 진도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울돌목이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의 현장 팽목항이 있다. 조상님들은 기적의 승리를 거뒀지만, 후손들은 300여 명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단군의 홍익정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느꼈다.

■ 진도 단군전(바로가기 클릭)
: 단군전은 진도향교에서 찾으면 된다.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진도향교길 68-5
문의) 061-544-2043

글. 사진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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