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탑사 이갑룡 공적비(사진=윤한주 기자)
탑을 쌓은 주인공은 석정 이갑룡(石亭 李甲龍, 1860∼1957) 처사다. 30년 동안 인근에서 돌을 날라 기단 부분을 쌓았고 상단 부분에 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해 날라왔다고 탑사 측은 전하고 있다.
탑사에는 크고 작은 돌탑이 자태를 뽐냈다. 그러나 돌탑의 신기함보다 석정의 상(像)이 유독 많아 보였다. 심지어 산신각에도 석정을 상으로 모셨다. 산신보다 3배는 더 커 보였다. 부처를 신앙하는 사찰임에도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처사(處士)란 말은 벼슬하지 못한 선비를 가리킨다. 불교와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이 처사는 예불도 염불도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세계적인 불가사의 중에 하나로 꼽히는 마이산 탑을 알기 위해 우리는 창건자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석정 이갑룡은 1860년 3월 25일 전남 임신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났다. 군졸(軍卒)이 되었다가 1년 만에 포장(捕將)으로 발탁이 됐다. 그러나 직을 사임했다. 뒤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25세에 마이산에 입산했다. 꿈에서 산신(山神)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어 수도에 전념했다. 그는 억조창생을 구원하고 만국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만불탑군을 쌓기 시작했다. 10년(또는 30년) 동안 끈질긴 신념으로 천지탑을 비롯하여 100여 기의 탑을 쌓았다. 현재 80여 기가 남아 있다.
▲ 마이산 탑사 산신각 내 이갑룡 상이다. 오른쪽 산신보다 더 크다(사진=윤한주 기자)
석정에 관해 평가는 엇갈린다.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국내 여러 명산을 다니면서 산제(山祭)를 올렸다는 점, ▲나라가 어지러웠던 시기에 군인이 된 점, ▲산신의 계시를 받고 마이산에 입산한 점을 주목했다.
박 교수는 “석정이 석탑에 들인 공은 부처님의 계시가 아니라 산신의 계시 때문이었고 이 탑을 지어 일제 침략을 무찌르겠다는 항일구국의 일념은 단군 정신에서 우러나왔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유불선 삼교에 통달한 도사(道士)로 알려진 석정 이갑룡은 종교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최규영 진안향토사연구소장(전 진안문화원장)은 “<마이산행감(馬耳山行感)>의 기록에 의하면 이갑룡은 공부실을 치성당(致誠堂)이라고 표현했다. 또 팔음신장(八陰神將)을 부린다는 얘기도 했다는데 신장을 부린다면 무당의 얘기이지 유∙불∙선과는 관련이 없다”라고 말했다.
최 소장은 “사적비에서 이갑룡을 도사(道士)라 하니 그럼 도교를 신봉했는가 하면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도량의 불상은 불당에 기복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안치한 것이지 이갑룡 스스로 예불도 염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이갑룡이 신봉했던 종교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 이갑룡의 사진과 이갑룡 상(사진=윤한주 기자)
그는 축지법으로 돌을 날랐다던가, 호랑이를 몰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이갑룡을 신화(神話)로 만들기 위한 소재’라고 분석했다.
“이갑룡이 마이산에 들어와 움막을 짓고 어렵게 살다가 신작로가 개설된 뒤 늘어나는 방문객들이나 치성객들에게 탑의 주인으로 적절한 대접을 받으려면 그에 걸맞은 종교적 카리스마가 필요했을 터이지만 이갑룡에게는 종교적 지식이나 소양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학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돌파구는 단 하나 뿐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남이 모르는 신기한 얘기를 하면 어떤 경우에는 이인(異人)으로 은사(隱士)로 도인(道人)으로 대접받는 경우까지 생겨나니까 그러한 행위는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차츰 대담해지게 마련이다. 탑을 자신이 혼자 쌓았다고 주장하다가 그 큰 돌을 혼자 어떻게 옮겼느냐는 질문이 나오면 축지법을 썼다는 대답이면 통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이갑룡의 많은 신기한 말들이 모두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석정이 평생의 사업으로 일궈낸 돌탑의 정체는 다음 편에서 소개하겠다. (계속)
글. 사진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 참고문헌
최규영,『마이산 학술연구』, 진안문화원 2002년
박성수,『단군문화기행』, 석필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