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죽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잘 죽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bad to good, good to greate]

브레인 17호
2010년 12월 16일 (목)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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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듯 고귀한 죽음을 맞기를 원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죽기 위한 준비 과정이자 죽음으로 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죽음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죽음에 대해 연구하는 학과가 대학에 개설됐는가 하면, ‘잘 먹고 잘사는’ 웰빙Well-being 못지않게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자’는 웰다잉Well-dying 움직임도 급속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기를 원한다.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나는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나 깨어남에 불과하다.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받으면서 가고 싶다.’

평생을 숲 속에서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자연주의자 스콧 니어링의 유언이다. 그는 1백 세 생일이 다가오기 한 달 전,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스스로 단식을 시작해 3주 만에 평온하고 자발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의 아내 헬렌 니어링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을 이렇게 회고했다.  ‘스코트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 안이 잘 정돈된 문가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 힘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가고 싶어 했다. 그이는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가기를 원했고,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죽음의 경험을 피하려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기꺼이, 그리고 편안하게 몸을 버리는 기술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기대했다. 말하자면 죽음으로서 그 자신을 완성한 것이다.’

스코트 니어링은 평소에 바라던 대로 자기 집에서 약물이나 의사의 도움 없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을 금기시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 또한 삶의 다른 국면처럼 환영받아야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 떨지 않고, 개인사의 가장 심각하고 불행한 일로 치부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 일과가 끝난 후 편안한 휴식을 취하듯 그렇게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


극단적인 동반 자살 풍조와 자살 불감증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죽음’에 대해 금기시해왔다. 생동하는 삶 속에 죽음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듯이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을 암묵적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는 사이 사회는 점점 더 물질 중심의 경쟁 사회로 변해갔고, 최근 들어 사회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현상이 부쩍 늘었다.

지난 4월에는 강원도에서 집단 자살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사회 문제로까지 불거졌다. 지속적인 경기 침체와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동반 자살하는 현상이 하나의 추세가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죽음을 바라보는 건강한 가치관이 부재하며, 자살 불감증이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실제로 OECD 가입국 중에 한국이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은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1993년만 해도 사망 원인 10위에 불과했던 자살률이 해를 거듭할수록 그 빈도가 높아져 2007년에는 사망 원인 5위를 차지했다. 20~30대의 경우 고의적 자해, 즉 자살로 인한 사망 원인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2007년 한 해만 1만2천174명이 자살했고, 자살률은 12%씩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자살을 흔히 개인적인 선택으로 치부하지만, 이러한 자살 현상은 그 시대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웰다잉, 어떻게 죽을 것인가

최근의 ‘웰다잉’ 움직임이 반가운 것은 그 때문이다. 이병찬 한국죽음준비교육원 원장은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무섭고 두렵다고 죽음을 피하기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차근차근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전했다. 그 역시 15년 전에 불치에 가까운 병을 얻어 조용히 죽음을 맞기 위해 산 속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욕심, 탐욕, 집착이 만병의 근원임을 깨닫고 병을 이겨낸 후 ‘행복한 죽음 전도사’가 됐다. 

실제로 자신의 인생에서 죽음을 맞닥뜨려본 사람은 삶에 대한 태도가 180도 달라지기도 한다. 평범한 주부인 이일선(40) 씨는 몇 년 전에 수술도 불가능한 자궁경부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당시 남편이 결핵에 걸리고 신용 불량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도저히 세 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이 씨는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암세포와 싸우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병원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을 수 없었던 그는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규칙적인 운동, 식이요법으로 병을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마침 암 진단을 받고 나서 수중에 보험금 2천만 원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그때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한 아이의 치료비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씨는 익명으로 보험금 중 일부를 아이의 치료비로 내놓았다. 치료비를 내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서 병원 계단에 앉아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 눈물은 슬픔과 회한의 눈물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눴다는 데서 오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MRI를 찍었는데, 놀랍게도 암 덩어리가 깨끗이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씨는 그 경험 후에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고, 지금은 이웃에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한번쯤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어떻게 죽기를 바라는지 아는 것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가와 동일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죽음에 대한 자기만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나치 치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본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린은 그들이 젊고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늙고 허약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살아야 하는 목표가 있는 사람들은 끝까지 버텼다는 것. 이처럼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나라의 ‘죽음 준비 교육’은 아직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는 주로 사회, 복지, 종교 단체 등에서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 수준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으로 가장 보편적인 것이 ‘미리 쓰는 유언장’이다. 유언장을 임종을 앞둔 경우에만 쓰는 것으로 떠올려 금기시했던 과거와 달리 사람들이 이제는 죽음을 가정한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봄으로써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를 갖기 시작했다.

인생의 작별인사를 남기는 유언은 한 개인사의 ‘마지막 과정’이 아니라 ‘중간 점검’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 기록은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는가를 드러낸다. 매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종 노트’를 쓰는 것도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삶을 치열하게 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아름다운 재단에서는 ‘아름다운 이별 학교’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유언장 쓰기, 영정 사진 찍기, 장묘 시설 방문, 입관 체험 등의 경험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마련해볼 수 있다. 사생체험연구소(
www.deathlife.co.kr)에서도 영정 사진을 찍고 유언장을 작성한 후 모의 장례식에서 입관 체험까지 죽음의 절차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우리 뇌는 실제 죽음을 경험하는 것뿐 아니라 가상 체험을 통해서도 뇌에 동일한 정보를 줄 수 있다.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고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체험하고, 직접 관에 들어가 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끝나갈 때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할 수 있고, 자신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통찰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일부, 천화의 가치관 필요

우리나라는 2000년에 이미 전체 인구의 7% 이상이 65세를 넘어 유엔이 정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평균 수명도 계속 늘어 2005년 기준으로 평균 78세가 되었다. 2018년에는 80세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이런 추세라면 2030년 이후에는 한국도 1백 세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수명이 꾸준히 연장되는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부재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자기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래 사는 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노인 자살이 세계 최고 수준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로 위장한 자살을 선택한 노인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정서적으로 소외되고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노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처럼 노인층에서 자살 인구가 늘어나는 것도 삶에서 인생의 목표를 찾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승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총장은 “선도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천화化’로 풀이한다. 성공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성장하고 완성하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곧 천화에 이르는 길이다. 성장과 완성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의 죽음을 천화라 한다. 우리의 정신 문화 속에 깃든 천화 사상은 삶의 목적을 깨우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하는 큰 지침이다”라고 설명한다. ‘너도 가고 나도 가는’ 공평한 죽음이지만 죽음의 가치는 개별적이다. ‘천화’는 스스로 그 가치를 선택하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2월 선종하기 전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장기 기증을 하고 떠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람들은 김 추기경을 기리며 진정한 삶은 죽음 이후에 제대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죽음의 의미에 대해 정의하는 일은 잘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살기 위해서 더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글·전채연
ccyy74@brainmedia.co.kr | 일러스트레이션·이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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