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안의 깨끗한 무엇 '양심' [이미지=게티이미지 코리아]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그렇다,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내 안의 깨끗한 무엇’, 바로 양심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한다. 양심은 내심의 가치적 또는 윤리적 판단은 물론 세계관, 인생관, 주의, 신념 등도 포함하는 심성으로서 그 형성과 유지에 이어 실현에도 자유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양심을 규제하면 남몰래 어기며 내심 불편하더라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들키지만 않으면. 그러나 양심에 자유를 허락하면 모든 책임이 내게 쏟아진다. 그래서 훨씬 더 무겁고 무섭다.
아루투어 쇼펜하우어는 “명예는 밖으로 나타난 양심이며, 양심은 안에 깃든 명예이다”라고 설명한다. 《최재천의 생태 경영》에서 나는 “서로 상대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평화를 유지하게 만든다. 우리 인간은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 이러한 힘의 균형을 깨고 홀로 거머쥐려는 속내를 내보인다. 우리가 자연에서 제일 먼저 배울 게 있다면 이 약간의 비겁함이다”라고 적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다. 모두 수시로 제 발 저리는 세상을 꿈꾼다. 양심과 명예가 살아 숨 쉬는 그런 세상.
양심은 인격적 존재가치를 지탱하는 내면의 부르짖음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1997년 3월 27일 ‘도로교통법제41조제2항등위헌제청’에 관한 선고에서 “양심이란 인간의 윤리적•도덕적 내심 영역의 문제이고, 헌법이 보호하려는 양심은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한 바 있다.
양심은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개인의 판단이지만, 다분히 인지적이고 추상적일 뿐 아니라 일정한 방향을 촉구하는 공동체 기준에 관한 지식으로서 사회적 차원도 지닌다.
양심은 개인의 인격적 존재가치를 지탱하는 마지막 내면의 부르짖음이다.
조선의 시대정신으로 꼽히는 ‘염치’
양심(어질 良, 마음 心)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을 일컫는다. 철학에서는 양심을 가리켜 인간이 사회적 맥락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을 느끼는 감정이라고 규정한다.
양심이 의식 혹은 감정이라면 염치(청렴할 廉, 부끄러울 恥)는 양심의 표상이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혹은 “염치도 없는 놈”이라는 표현을 보면 양심과 염치는 거의 동의어처럼 쓰는 것 같지만, 나는 양심은 심성을 가리키고, 염치는 행위를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염치를 ‘조선의 시대정신’이라고 추켜세운다. 조선시대에 선비가 사대부 집안에서 음식 대접을 받으면 보통 밥의 3분의 1 정도만 먹고 물렸다고 한다. 그래야 그 댁 종들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대부가 남의 집 종의 눈치를 보며 식욕 본능을 자제하는 게 바로 염치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는 어느 날, 졸지에 광해의 대역으로 궁궐에 들어온 저잣거리 만담꾼 하선이 난생처음 뻑적지근한 수라상을 받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지켜본 내관이 “전하께서 남기신 어식으로 수라간 궁녀들이 요기를 하옵니다”라며 언질을 준다.
이후 수라상을 받은 하선은 팥죽을 한 입만 먹고 “오늘은 이걸로 됐다. 수라를 내 가거라” 명한다. 어느덧 하선은 나인들의 눈치를 보며 왕의 지위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염치를 차리게 된 것이다.
오마이뉴스 이주연 기자는 책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에서 《조선왕조실록》에 염치라는 단어가 무려 2067번이나 등장한다는 걸 발견했다고 밝혔다. 1410년 태종은 ‘예의염치’는 나라의 네 가지 뼈대이므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도록 하라고 하명했다. 예절을 뜻하는 예禮, 의리를 뜻하는 의義, 청렴을 뜻하는 렴廉, 부끄러움을 뜻하는 치恥는 한데 합쳐 양심을 나타낸다.
언제부터인가 ‘양심’이라는 단어가 일상 대화에서 사라졌다
“예끼, 이 양심에 털 난 사람 같으니라고”, “양심은 어디 엿 바꿔 먹었냐?”,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내가 어렸을 때는 일상적으로 듣던 말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양심’이라는 단어가 우리 일상 대화에서 사라졌다. 왜일까?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단어가 사라지는 이유는 그 단어를 대체할 용어가 새롭게 등장했거나, 그 단어가 묘사하는 존재나 상황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스티븐 핑거는 이러한 현상은 그 자체가 본래 언어가 작동하는 방법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쓰레기 수거’라는 단어가 ‘위생관리’로 바뀌고, 또다시 ‘환경 서비스’로 바뀌었죠. ‘변소’는 ‘욕실’과 ‘세면실’을 거쳐 ‘화장실’로 바뀌었고, ‘깜둥이’가 ‘흑인’으로,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양심이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추는 과정에서 그를 대체한 말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기껏 떠오르는 말은 ‘쪽팔리다’라는 비속어 정도였다.
겁이 양심의 발현을 막을 때 용기를 부르는 지혜의 힘
양심이란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고 개선하는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양심을 따르기만 하면 우리의 선택이 도덕적으로 항상 올바른 선택이 될 것이라 믿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령이 우리의 양심에 도덕적 진리를 새겨준다고 확신한 마틴 루터의 양심 무류성無謬性은 착각의 산물이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는 오히려 용기가 부족해 양심의 부름에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겁怯이 양심의 발현을 막는다. 그러나 겁이 나는 것은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이고, 겁이 나더라도 끝내 용기를 내는 데는 지혜의 힘이 필요하다. 사물의 도리나 이치를 분별하는 능력을 뜻하는 지혜는 양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 소중한 덕목이다.
‘호모 심비우스' 공생하는 인간이라는 학명을 만들고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공생하는 법을 제안한 진화생태학자 최재천 교수의 《양심》 중에서
※ 인사이트는 《브레인》에서 선정한 뇌과학 도서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인간의 뇌에 대한 아포리즘 및 다양한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