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시적인’ 기관은 아마도 눈이 아닐까 합니다. 눈은 어쩐 일인지 늘 정신적인 것과 연관되곤 합니다. 입이나 귀나 코를 정신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눈은 똑같은 감각기관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감각을 넘어서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눈의 이런 특성은 성서에서부터 언급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다”(마태오 6: 22).
그래서인지 동방 그리스도교의 이콘 성화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얼굴에서 눈을 강조합니다. 입은 상대적으로 아주 작게 그리고 코는 가늘게 그리는 반면, 눈은 항상 크고 강렬하게 그립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눈은 영혼의 기관인 데 비해 입은 음식을 먹고 거짓을 말하는 죄악의 기관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어느 문화권을 막론하고 시와 노래는 늘 연인의 눈을 찬미합니다. 바다처럼 깊고 푸른 눈, 사랑스러운 갈색 눈, 정열의 검은 눈은 아름다운 여인의 트레이드마크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눈은 확실히 표정이 가장 풍부한 기관입니다. 물론 코나 입도 분노나 절망이나 불만족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귀는 전혀 표현하지 못합니다) 눈만큼 풍요로운 표정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눈을 가리켜 ‘마음의 창’이라 부르는 것은 인간이 눈을 통해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은 마음을 이어주는 통로
일찍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눈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소통의 도구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말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말로 소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실패와 좌절을 겪습니다. 반면에 진실로 소통을 원하는 인물들은 눈빛만으로 완벽한 상호이해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남자 주인공 레빈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하는 날의 정경을 예로 들어볼까요.
“그녀는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하여 그에게로 끌려왔다. 레빈은 다만 그녀의 맑디맑은 진정어린 눈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 눈은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과 똑같은 사랑의 기쁨으로 해서 겁먹고 있는 듯했다. 그 눈은 사랑의 빛으로 그의 눈을 멀게 하면서 점점 더 가까이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전쟁과 평화》의 눈빛 이야기는 이보다 더 강력합니다. 주인공 피에르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적군 사령관 앞으로 끌려갑니다. 자칫하면 처형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사령관과 포로는 서로를 응시하는 동안 적군과 아군의 경계를 넘어갑니다.
“그들은 두 명의 인간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했다. 무한한 경험의 공유가 이루어진 한순간이었다. 그 속에서 그들은 모두 인류의 아이이며 형제임을 알았다.”
이쯤 되면 눈은 단순한 감각기관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눈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내 마음을 표현하며 상대방과 나의 진실한 교감을 가능케 하는 도구입니다. 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아니, 사실 문제는 눈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눈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통로일 뿐입니다.
눈이 있다고 해서, 혹은 ‘응시’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인 레빈, 피에르는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소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란 말은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볼 때 눈은 비로소 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본다는 것은 뇌로 보는 것이다
놀랍게도 최근의 뇌과학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뇌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로 본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대상이 발하는 빛이 동공을 지나 수정체를 통과하여 망막에 투사되고, 거기서 만들어진 전기적 신호가 시각과 관련된 대뇌피질로 전송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전기 신호를 뇌로 전달하는 다른 경로가 제공된다면 반드시 눈이 아니어도 사물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신경학자였던 폴 바크-이-리타 박사는 “눈은 뇌에 정보를 보내는 기관에 지나지 않으며 눈이 없다고 해도 뇌만 있다면 대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감각 피드백 장치를 사용하여 혀로 보는 실험을 했고 실제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되는 현상도 있습니다. 즉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시각실인증(visual agnosia)이라 불리는 장애가 곧 그것인데, 이 장애를 앓는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시력에는 전혀 이상이 없고 기억력에도 문제가 없는데 대뇌의 한 부분에 생긴 손상 때문에 자신이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각실인증이란 말 그대로 ‘보고도 못 보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본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본 것을 해석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로 보고 마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오면서 보고도 못 알아보고 지나친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해봅니다. 무심히 바라보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들, 마음의 눈에 걸러지지 못해 사라져버린 것들 말입니다.
서양 속담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 반대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라고요. 대상에 대한 마음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니까요. 우리에게 진정으로 보이길 기다리며 끊임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 사람과 사물들에게 고개를 돌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본다면 정말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글·석영중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뇌를 훔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