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 줌의 고독

[칼럼] 한 줌의 고독

뇌문화 칼럼

브레인 33호
2013년 01월 15일 (화)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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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구소련의 대문호입니다. 그의 대표작이자 유일한 장편소설인 《닥터 지바고》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나라 독자에게 매우 친숙한 작품입니다. 최근에는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지요.

《닥터 지바고》는 주인공 유리 지바고의 삶을 통해 개인과 전체의 문제를 조망하는 작품입니다. 소설은 혁명과 내전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배경으로, 한 유약한 지식인이 어떻게 위압적인 전체에 맞서 스스로의 존재를 역사에 각인시키는가를 보여줍니다.

지바고는 의사이지만 치료하는 일보다 시 쓰는 것을 더 좋아하는, 현실적인 일에는 철저하게 무능한 남자입니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애인도 모두 잃어버리고 폐인처럼 되어 생을 마치지만, 그가 쓴 시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인간 정신의 불멸을 확신시켜줍니다. 지바고의 시 중에서도 특히 ‘햄릿’은 소설 전체, 그리고 파스테르나크의 생각 전체를 요약해준다는 평가를 받는 불후의 명시입니다. 그 마지막 연은 이렇습니다. 

연극의 순서는 이미 정해진 것
여정의 끝은 돌이킬 수 없지
나는 혼자다. 세상은 바리새이즘 속으로 침몰한다
그래, 산다는 것은 만만한 게 아니야 

여기서 화자는 “나는 혼자다”라고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혼자’라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이고 고독하다는 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은 그 ‘혼자’임이 결코 힘들고 아픈 상태는 아님을 보여줍니다.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바리새이즘(율법주의)으로 빠져듭니다.

오로지 시인 ‘혼자’만이 바리새이즘에 대항하여 고고하게 서 있습니다. 덧없는 욕망과 헛된 담론과 무의미한 법칙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로지 시인 혼자만이 단호하게 자신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혼자라는 것은 용기와 고결함과 자긍심의 동의어입니다.

인간은 고독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 

소통의 의의를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통, 함께함, 공동체, ‘같이 가기’ 못지않게 고독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고독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인 존재이자 개인적인 존재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세기의 고전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로 집을 짓고 2년여간 홀로 살면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는 고독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내 주위에는 소나무, 호두나무와 옻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고독과 정적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오직 새들만이 곁에서 노래하거나 소리 없이 집안을 넘나들었다. 나는 밤 사이의 옥수수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정말이지 이런 시간들은 손으로 하는 그 어떤 일보다 훨씬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공제되는 시간들이 아니고 오히려 나에게 할당된 생명의 시간을 초과해서 주어진 특별수당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동양 사람들이 일을 포기하고 명상에 잠기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심리학 분야에서 행해진 일련의 연구들은 소로나 파스테르나크가 문학적으로 말한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함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에서 다니엘 길버트 교수가 감독한 연구팀은 실험을 통해 혼자서 과업을 수행한 사람들이 단체로 과업을 수행한 사람들보다 더 지속적이고 정확한 기억력을 유지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발달 심리학자인 리드 라슨 교수 역시 여러 편의 연구 보고서에서 혼자 있는 시간의 생산성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그는 특히 청소년기에 적정 시간(라슨 교수에 따르면 깨어 있는 시간의 약 30 퍼센트)을 혼자 보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기 조절을 더 잘하고 적응도 더 잘하며 성적도 더 좋다고 주장합니다.

굳이 이런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인간이 홀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때 더욱 완성된 자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됩니다. 

자발적인 ‘홀로 있음’의 즐거움 

문제는 이런 홀로 있음이 반드시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파스테르나크나 소로는 강제된 고독을 만끽한 것이 아닙니다. ‘따돌림’의 결과 강제된 고독은 인간에게 성장이 아닌 고통을 선사합니다. UCLA의 나오미 아이젠버거 교수와 그녀의 연구팀은 공놀이 실험을 통해 배제와 통증의 상관성을 밝혀냈습니다.

피실험자는 컴퓨터상에서  다른 두 상대와 공놀이를 합니다. 다른 두 상대가 피실험자에게 공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동안 지속되면 피실험자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때 피실험자의 뇌를 자기공명단층촬영으로 들여다보면 신체적인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활성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심리적인 따돌림은 신체적인 통증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비유적으로 “상처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뇌과학적으로는 전혀 비유가 아닌 셈입니다.


고독의 자발적인 선택은 음식의 섭취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먹는다는 것은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잘 못 먹는 것’도 필요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디톡스’의 개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양과다는 영양실조 못지않게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체내의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단식을 하거나 소식을 하는 것이 건강에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는 것, 강제된 굶주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절제라 할 수 있습니다.


자발적인 고독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돌림이나 유폐가 아닌 고독, 스스로 선택한 홀로 있음은 소란한 어울림에서 벗어나 내면의 자아와 마주할 수 있는 풍요한 시간입니다. 사실상 고독은 외롭고 힘든 상태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깃들인 창조적인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소통이 강조되는 세상에서 한 줌의 고독은 일부러라도 움켜쥐어야 할 소중한 보물입니다. 어쩌면 학교에서도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혼자 있는 시간 잘 보내기’ 같은 것을 가르치고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글·석영중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뇌를 훔친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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