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낯익은 만남

낯설지만 낯익은 만남

뇌과학에 반한 문학가 석영중 교수

브레인 30호
2013년 01월 15일 (화)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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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과학은 서로 극을 이루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였던 문학과 뇌과학의 만남을 《뇌를 훔친 소설가》라는 책으로 멋지게 성사시킨 인문학자가 있다.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석영중 교수는 요즘 뇌과학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문학가에게 듣는 뇌과학의 매력이 궁금했다.

뇌과학 책 속에서 문학을 만나다
30년이 넘는 시간을 문학 연구에 전념한 석영중 교수가 잠시 외도 아닌 외도를 했다. 몇 년 전부터 일반인도 뇌 관련 기사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게 된 만큼 뇌와 과학은 날로 우리 생활에 가까워지고 있다. 석 교수가 뇌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정확히 어떤 책이었는지 지금은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흥미를 끄는 뇌과학 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어요. 읽어 보니 뇌과학 책들은 또 다른 인문서 같은 느낌이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어, 이건 도스토예프스키, 이건 톨스토이가 소설에서 이미 말했던 건데…….’

하고는 떠오르는 소설과 생각들을 메모하고 있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죠.” 분명 과학책인데 문학작품 속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뇌과학에 빠져든 석 교수는 뇌과학서들을 읽을 때마다 문학과 겹치는 부분이 떠올랐고, 문학과 과학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운 것에 놀랐다.

과학 문외한의 새로운 발견
석영중 교수는 스스로를 수학, 물리 등 수 개념과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과학 문외한이라고 소개하지만 그는 결코 과학 문외한이 아니다. 1992(4325)년 계간지 <과학사상>에 ‘어느 문학도가 만난 과학’이라는 에세이를 기고한 적도 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공상과학소설 읽는 게 습관일 만큼 공상과학소설 매니아이다.

한동안 공상과학소설에 빠져 2000년대 초반까지 출간된 공상과학소설을 빼놓지 않고 다 읽었을 정도이다. 또 두 권의 공상과학소설을 번역할 만큼 공상과학에 대한 애정도 깊다. 그럼에도 그가 그동안 과학 분야 쪽으로 조금 더 일찍 눈을 돌리지 않았던 건 대개 디스토피아적인 결말이 많은 공상과학소설의 주제가 그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과학 문외한이라고 스스로 옭아맨 편견 때문에 많은 것을 놓쳤을지도 몰라요. 그런 편견 속에서 접하게 된 뇌과학은 ‘눈이 열렸다’고 할 만큼 새로운 세상이었어요.” 무엇보다 우리 삶과 밀접했고 문학과 닿아 있는 부분이 많았다. 모두 하나로 통하고 있었던 것.

책이 나온 후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의 반응은 대부분 ‘놀랍다’였다. 우려나 부정적인 목소리보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이 많아서 힘을 받았다. 그리고 10~20여 년 전부터 연구 방법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뇌과학을 접하면서 그 실마리도 찾았다고 한다.


뇌과학은 그의 삶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몰입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재미있게 책 작업을 했어요. 책을 집필하고 나서 사고방식이 유연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항상 소통과 융합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그동안 알게 모르게 아집도 강했고, 러시아 문학, 그리고 문학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문학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젊은 시절에는 정통적이고 권위적인 문학 서적을 주로 읽는 편협한 독서를 했지만 요즘 뇌과학 분야의 책들을 읽으면서 ‘지금 뇌의 어느 부분의 뉴런이 발화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는 중이라고. “바쁘더라도 좋아하는 걸 하니까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뇌과학 책을 읽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대중적인 뇌과학 책을 쓴 필자들에게 감사해요. 저 같은 과학 문외한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뜰 계기를 마련해 줬으니까요.” 이제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공상과학소설 대신 뇌과학서가 놓여있지 않을까.



융합의 시대, 균형이 필요하다
뇌과학과 문학의 공통점은 아마 ‘인지’ 에서 출발할 것이다. “30년 넘게 공부한 문학에 비해 뇌과학 공부는 2~3년 정도여서 뇌과학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뇌과학은 인간의 내면을 읽기 위한 생물학적인 인간의 인지과정에 대한 연구이고, 문학은 인간의 인지과정을 거쳐 태어난 인간에 대한 탐구 보고서로서 우리는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소설에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야기를 만들 때에는 굉장히 논리적인 작업과정이 필요하죠. 그렇게 보면 가장 인지적인 장르는 원인과 결과 등 모든 구성 요소들이 논리적이어야 하는 추리소설일 테고, 가장 덜한 건 아마도 낭만시일 거예요.”


문학과 뇌과학의 다른 점은 문학가나 문학은 신비주의적 구석 즉,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무엇인가 딱 잡아 말할 수 없는 신비로움, 심연이 있는 반면, 일부 뇌과학자들의 주장처럼 뇌과학자와 뇌과학은 지금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 일도 궁극에 가서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런 과학 앞에서는 신비로움이나 심연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곧 밝혀질, 밝혀져야만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책 전반에 걸쳐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예전에 한 은사님께 문학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은사님은 삶이 없으면 문학도 없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무엇이든지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었지요. 모든 가치를 한 곳으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분명히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테고,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한계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많은 인문학자와 뇌과학자의 공동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는 요즘 ‘융합’이라는 화두에 관심이 많다. “저에게 뇌는 새로 사귄 친구와 다름없어요. 최근에 사귀었지만 굉장히 설레고 같이 있고 싶은 벗이죠. 앞으로 계속 뇌과학과 문학의 접점을 찾는 연구를 할 생각인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말 궁금해요. 새롭게 펼쳐질 결과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무척 흥분되고 설렙니다.”


문학과 뇌과학은 많은 접점을 찾을 수 있음에도 아직까지는 서로 거리가 멀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금씩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두 분야도 융합될 수 있겠죠. 이후에 진정한 소통도 가능한 것이고요. 서로 다른 두 분야의 지식이 합쳐져 더 새로운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해요.”


지금 그는 삶과 문학 그리고 과학의 통합과 소통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대중은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만 딱 거기까지예요. 재미에서 그치고 말지요. 소설 평론이나 소설 연구 등은 다른 나라 이야기죠. 문학과 뇌과학의 접점을 찾아서 대중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설 평론과 연구에도 관심을 일으키도록 앞장서고 싶어요. 앞으로 저와 같은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나온 책을 통해서 독자들이 문학 연구가 따분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것, 자신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는 그의 다음 프로젝트가 기대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종교적인 소설을 많이 썼는데, 그에 대한 연구를 더욱 확장해서 신경신학(neurotheology: 성당이나 절에서 신자들이 기도와 명상을 통해 절대자와 영적으로 일체감을 느끼는 신비체험을 할 때 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연구)과 관련된 논문을 써보고 싶어요.”

굳이 뇌의 신경가소성에 관한 어려운 책을 읽지 않더라도 그를 통해 중년의 뇌가 가진 활발한 신경가소성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글·정소현 nalda98@brainmedia.co.kr
사진·박여선 pys03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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