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 라이프] ‘때’를 아는 지혜

공생 라이프

브레인 87호
2021년 09월 11일 (토)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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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節氣)를 알면 삶이 보인다

동양의 우주론은 시간과 공간의 변주곡이다. 그중에서도 ‘시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때’를 알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했다. 연애도 공부도 다 때가 있다는 흔한 말은 동양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때는 숫자로만 인식되는 시간과는 다르게 어떤 사건이나 드라마를 동반한다. 그 안에는 시공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맺는 삶의 복합적인 관계가 들어있다. 

우리 가까이에서 ‘때’를 일러주는 동양의 오랜 지혜. 해독되지 않은 암호처럼 달력 곳곳에 숨어 있는 그것이 바로, ‘절기력(節氣曆)’이다. 절기력은 태양이 움직이는 스물네 걸음이다. 태양이 움직일 때마다 하늘과 땅, 사람에게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태양이 첫발을 내디디면 땅속 깊이 봄이 시작되고(입춘 立春), 두 번째 걸음을 떼면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 (우수 雨水) 세 번째 발자국에서는 개구리와 벌레들이 겨울잠을 깨고 땅 위로 나온다. (경칩 驚蟄) 이렇게 태양은 보름마다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며 1년 동안 한 바퀴를 돈다. 

자연에 기대 살던 농부들은 절기력을 이정표로 삼았다. 입춘부터 대한까지 24절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해의 농사가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기는 어떤 의미일까?

현대문명과 자본주의는 봄과 여름에 해당하는 발산과 소유, 증식의 필요성만을 알려주었다. 가을과 겨울에 해당하는 수렴과 휴식, 빈 공간의 가치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다.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소통이다. 인간과 우주, 삶과 자연의 리듬을 절기의 지혜에서 배워보자. 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 

봄의 절기들, 입춘부터 곡우까지

양력 2월 4일을 전후로 봄을 알리는 입춘(立春)이 온다. 하지만 막상 입춘이 되어도 봄은 약동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김장독에 오줌독까지 깨지는 입춘 추위라는 말이 다 있을까. 입춘의 한자가 ‘봄(春)의 기운이 만들어지는(立) 때’라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사실 하늘은 일찌감치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입춘에 한참 앞선 겨울 동지(冬至)가 하늘 입장에서는 봄의 출발점이다.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절기로 이때를 기점으로 밤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낮은 조금씩 길어진다. 이때부터 겨우내 얼어있던 대지도 태양열로 차츰 데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봄은 그렇게 아주 천천히 한 달 반에 걸쳐 입춘의 땅에 도착했다. 

▲ 절기력(節氣曆)

“봄철 석 달은 발진(發陣)이라고 하는데 천지가 모두 생겨나고 만물이 자라난다. 이때는 밤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천천히 뜰을 거닐고 머리를 풀고 몸을 편안하게 하며 마음을 생동하게 한다. 무엇이든 살려야지 죽여서는 안 되고, 주어야지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봄기운에 호응하는 것이니 양생의 방법이다.” - <동의보감> 내경편 신형 18쪽 

봄철 석 달 ‘발진’의 한자는 필 ‘발(發)’에 베풀 ‘진(陣)’이다. 즉 봄에는 겨우내 긴장한 몸과 마음을 풀어놓거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잘 돌보라는 의미가 있고, 생명이 솟아나는 양기(陽氣)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봄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소중히 살려내는 때이다. 

그래서 입춘에는 재미있는 세시풍속도 많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입춘방을 대문 앞에 붙여 한 해의 행운과 복을 기원하기도 하고,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은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은 해놓는 입춘 풍속이다.

거지의 움막 앞에 밥을 한솥 해놓는다든지, 마을 앞을 깨끗이 청소해 놓는다든지 하는 훈훈한 일은 얼어있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준다. 이런 마음들이 인연을 따라 번져 나가면 그 자체가 봄이다.

입춘이 지나 2월 19일 전후에는 강물이 녹는 우수(雨水)가 찾아온다. 옛사람들은 이즈음에 장(醬)을 담갔는데 이때 담그는 정월 장의 맛은 으뜸 중의 으뜸으로 쳤다. 우수에 담근 장은 맛과 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장맛을 제대로 내려면 뚝심 있게 오랜 숙성을 기다려야 하는데 장에는 ‘오덕(五德)’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덕성이 있다고 한다. 

“단심(丹心) 다른 맛과 섞여도 제맛을 낸다.
 항심(恒心)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다.
 불심(佛心) 비리고 기름진 냄새를 제거한다.
 선심(善心) 매운맛을 부드럽게 한다. 
 화심(和心) 어떤 음식과도 조화를 이룬다.”
 - <재미있는 세시음식 이야기> 윤숙자 47쪽

일 년을 시작하는 우리 역시 이때 마음의 장(醬)을 제대로 담가야 일상의 맛이 깊어지지 않을까? 농부들이 일 년 농사를 계획하며 땅을 고르고, 아낙네들이 장을 담그듯 우리도 이즈음에 1년의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아야 한다. 나에게 과연 줏대 있는 단심이 살아있는지, 한결같은 항심이 있는지, 첫 마음을 지키는 불심과 선한 마음, 그리고 조화로운 화심이 있는지를 찬찬히 살펴볼 때이다.

3월 5일을 전후로 경칩(驚蟄)이 오면 여기저기에서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본격적인 봄의 기운이 하늘과 땅을 지나 사람에게도 찾아오는 때가 되면 오행(五行) 중 목(木)의 기운이 그 어느 때 보다 강성해진다.

실제로 3월은 목 기운이 가장 강한 묘월(卯月)이다. 목 기운은 오장육부 중 간담(肝膽)에 속하는데, 목극토(木剋土)의 원리로 토(土) 기운에 배속된 위장을 약하게 한다. 위장은 맛으로 치면 단맛이다. 그래서 이 무렵에 찾는 것이 고로쇠 수액이다. 이 시기에는 은은한 천연의 단맛을 보충해주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해 위장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3월 20일을 전후로 춘분(春分)이 오면 더 이상 움츠리고 있을 핑계가 사라진다. 밤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절기인 춘분은 드디어 음기(陰氣)를 물리치고, 양기(陽氣)가 대세로 등극하는 시점이다.

재미있는 것이 이때 세시풍속 중에 ‘머슴 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날은 주인이 일하는 머슴들을 위해 크게 한턱을 내는 날이다. 이는 곧 농번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하는 때가 왔으니 그 전에 배불리 먹고 마시며 왁자지껄 사기를 높이는 것이다. 한바탕 즐기고 난 후에는 논밭으로 나가 땀을 흘리며 밥값을 해야만 한다.

춘분 무렵 찾아오는 것이 꽃샘추위이다. 음양(陰陽)이 대세 싸움을 하는 것이 꽃샘추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차가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면(陽), 차에 탄 사람들의 무게 중심은 한껏 뒤로 젖혀지지만(陰), 어쨌든 차는 출발한다.

꽃샘추위는 음기의 쏠림현상이자 마음속의 저항감일지도 모른다. 이 음기의 끝자락을 과감히 벗어던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몸과 마음, 그리고 주변을 청소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운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일상의 묵은 때를 씻어내고, 주변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진짜 봄이 다가와 있을 것이다.

4월 5일을 전후로 청명(晴明)이 오면 화사한 꽃들이 만개한다. ‘춘(春)’이라는 글자만으로 가슴 설레게 했던 입춘부터 목을 빼고 봄을 기다렸건만 봄의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에 이르러서야 봄이 왔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고집스럽게 지켜온 계절에 대한 관념 때문일지도 모른다. 계절의 다양한 스펙트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를 통과하는 매일매일의 계절들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24절기에서는 각 계절을 세 가지로 나누어 표현한다. 봄 만해도 아직 추위가 덜 가신 입춘과 우수를 맹춘(孟春)이라고 하고, 봄이 보일락 말락 하는 경칩과 춘분을 중춘(仲春)이라고 한다. 그리고 완연한 봄인 청명과 곡우를 계춘(季春)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계(季)’를 파자하면 벼(禾)와 아이(子)로 덜 자란 막내, 즉 늦봄을 뜻한다. 

“계춘의 달에는 봄의 생육하는 기운이 바야흐로 성대해져서, 양의 기운이 활발해져 흘러 넘치게 되니, 굽어 자라는 것들도 모두 지면으로 나오게 되고, 곧게 자라나는 것들은 모두 생장하게 되니 천자(天子)는 인색하게 재물과 곡식을 안에 감추어 두어서는 안 된다.” - <역주 예기집설대전> 월령 정병섭 옮김 216쪽

춘분은 무엇이든 베푸는 마음이 중요한 때이다.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인색하게 굴지 않고 마음을 활짝 열어 베푸는 것은 대지의 가임기인 춘분에 따뜻한 땅을 믿고 팔을 넓게 펼쳐 훠이훠이 파종하는 농부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4월 20일을 전후로 한 곡우(穀雨)가 오면 비는커녕 가뭄이 엄습해 온다. 곡우는 비를 바라는 농부들의 간절함이 담긴 이름이다. 곡우에는 볍씨가 싹을 잘 틔울 수 있도록 소금물에 담가 살균과 살충을 했다고 한다.

흔히 실없는 소리를 할 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말을 쓰는데 씻나락은 볍씨의 사투리이다. 이토록 애지중지하는 씻나락을 귀신이 까먹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곡우 무렵 볍씨를 담글 때는 부정이 탈까 실없는 말도 삼갔고, 조문도 자제했다고 한다. 

옹골진 볍씨는 생명 에너지의 정수이다. 그 안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 우리는 이때 무엇을 해야 할까? 입춘에 뜻을 세우고, 우수에 응어리진 마음을 풀고, 경칩에 과감해지고, 춘분에 갱신하고, 청명에 마음을 활짝 열었다면, 곡우에는 옹골찬 볍씨처럼 그 모든 에너지를 한 점에 모으자. 바로 ‘삶의 현장’에.

볍씨가 응축되어 땅속에서 발아하듯 인간은 삶의 현장에서 무수한 관계를 맺으며 발아한다. 일과 사람 속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마음의 골밀도를 강화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아!’하고 깨닫기도 한다. 비가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농부의 기도에서 한 해 농사가 시작되었듯 삶의 현장에서 관계 맺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우리를 완성시키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참고서적 
<동의보감 내경편> 허준 저 법인문화사  
<재미있는 세시음식 이야기> 윤숙자 저 질시루 
<역주 예기집설대전> 월령 저 정병섭 옮김 학고방
<절기서당> 김동철 저 북드라망
<24절기와 농부의 달력> 안철환 저 소나무 
<한국의 세시풍속> 장주근저작집 간행위원회 

글. 신은정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SBS 시사교양국 방송작가로 일했다. 취재 차 들른 미국 세도나에서 명상을 만나 인생의 궤도를 수정한 후 힐링명상 체인지TV, 일지스튜디오 책임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삶의 서사를 이끄는 몸과 우주, 의역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탐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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