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 : 선생님, 감정기복이 심해서 힘들어요. 감정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좀 편안하지 않을까요?
하나현 :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어떡하죠? 편안한 느낌도 감정인데...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가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참 감정적이네.’라고 하기도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감정 있어?’라고 묻기도 한다. 그것은 감정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담은 표현이다. 그런데 진짜 감정을 못 느끼면 어떤 일이 생길까?
물론 감정을 못 느끼면 앞서 김양이 생각한대로 ‘편리’할 수도 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판단할 수 있고 실수를 해도 당황하지 않고 적절히 대처할 수도 있다. 누군가 부당하게 나에게 분노를 표출해도 덤덤히 넘길 수 있고 주식을 해도 헛된 기대감으로 손절매시기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 남성이 상담하러 왔다. 제일 힘든 점은 무기력해지고 게을러진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무슨 재미로 사세요? 저는 아무런 재미도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욕심도 없다는 것이다. 웃긴 영화를 봐도 재밌지도 않고, 남들 다 우는 슬픈 드라마를 봐도 눈물이 안난다고 했다. 누굴 좋아하는 감정도 안 생긴다고 했다. 이분은 감정표현불능증으로 고통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감정표현불능증이란 감정을 인식하거나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보이는 상태를 말한다. 영어로는 Alexithymia라고 하는데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lexi’는 영어의 ‘word’ 즉 단어라는 뜻을, ‘thym’은 ‘soul’ 즉 영혼이란 뜻이다. 영어에서 앞에 ‘a’가 붙으면 부정을 나타내기 때문에 결국 ‘영혼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음’이라는 뜻이 된다.
감정표현불능증이 있는 경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감정에 따른 신체적 반응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를 언어로 ‘번역’하지 못하는 것이다. 화 나거나 짜증날 때 생기는 심장두근거림, 얼굴이 달아오름 등의 느낌을 그냥 ‘몸에 이상이 생겼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감정으로 일어나는 신체 반응들, 특히 스트레스로 일어나는 소화불량, 극심한 두통, 가슴답답함, 손발저림 등의 신체증상들을 병으로 인식해 병원에 당장 달려가지만 ‘스트레스성’이라는 말만 듣고 돌아오기 일쑤다. 얼마나 답답하겠나 싶다. 자신은 분명 병이 있는 것 같은데 마음의 문제라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둔감하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된다거나 설레는 느낌, 열정적인 느낌을 느낄 수 없어 일상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누가 억지로 시키거나 회사에서 하라고 하니 마지못해 그나마 움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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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스스로도 감정에 대한 인식이 잘 안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만큼 다른 사람의 감정도 잘 알 수 없다. 우리가 우리 경험을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느끼는 느낌을 같이 공유하고 싶고 공감받고 싶고 함께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한창 신나게 이야기했는데 상대방이 “그래? 그게 뭐.” 이런 반응이라면 더 이상 소통하기가 싫어진다. 그러면서 서로 감정으로 소통할 기회를 더 잃어버리게 되고 공허감이라는 불편한 느낌만 남게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감정에 무딘 사람이 이성적인 판단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도 하지만,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이처럼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힘들다. 감정 자체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이를 조절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대의 감정을 물감처럼 써서 삶이라는 캔버스 위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라. 그러나 감정에 빠지지 말고 당신의 영혼을 느껴라. 당신의 감정이 당신의 영혼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감정을 쓰게 하라”
일지 이승헌 총장의 저서 ‘붓그림명상’에 나오는 글귀이다. 감정은 인생의 색깔을 입혀주는 물감과도 같다. 무미건조한 경험들에 다양한 색채를 입혀 더욱 풍성한 느낌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새롭게 돋아나는 새싹을 보면 생기 있고 신선한 기분이 들고, 비가 오면 감성에 젖다가 그 덕분에 해가 뜨면 환하고 밝은 기분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감정을 마냥 어렵고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기보다 이제 감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잘 다루는 연습이 필요할 때다.
글. 하나현 교수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교수이자 브레인트레이닝 심리상담센터 압구정점 소장이다. 감정관리전문가로서 활동하며 상담과 강의를 통해 감정힐링을 돕고 있다. 모두가 감정의 주인이 되어 서로를 힐링하며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꿈꾸고 있다.
감정노동 힐링365 캠페인 www.emotionhealing365.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