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이해에 대한 핵심 단서, 뇌 관련 책에서 찾다
《나를 알고 싶을 때 뇌과학을 공부합니다(Whole Brain Living: The Anatomy of Choice and the Four Characters That Drive Our Life)》.
서른일곱에 뇌졸중을 겪은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의 두 번째 책 제목이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뇌를 연구하던 저자는 좌뇌가 손상되면서 우뇌로만 살았던 경험을 TED 강연에서 나누며 크게 주목을 받았다.
최근 한 해 8만 종에 이르는 신간들 가운데 과학 관련 도서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중에서도 뇌과학 관련 책은 뇌에 대한 담론의 확산과 함께 꾸준히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다.
우울증, 트라우마, 주의력결핍 등 정서적 . 감정적 문제를 비롯해 마음 기제의 총 사령탑이 뇌라는 인식이 일반화함에 따라 인간 이해에 대한 핵심 단서를 뇌 관련 책에서 찾는 이들이 느는 것은 당연한 흐름으로 보인다.
치열한 뇌과학 공부 모임 ‘박자세’
▲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은 뇌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의 열정적인 학습공간이다. 이 모임을 이끌어온 박문호 박사는 2003년 ‘과학독서 운동’에 이어 '특별한 뇌과학'까지 20년째 진행하고 있다.
“지식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들어서 이해되는 지식은 결정적 지식이 아닙니다. 결정적 지식을 만났는가에 따라 학습 강도가 달라지는데, 사람마다 결정적 지식은 다를 수 있어 지식은 평등하지 않다고 볼 수 있죠.”
이 같이 지식의 불평등성에 대해 말하는 박문호 박사 자신의 결정적 지식은 ‘뇌과학’이다. 그는 무려 20여 년 전에 뇌과학을 공부하자는 취지로 모임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최근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이하 박자세)’으로 성장해 과학문화 대중화의 선두에 서 있다.
박자세는 뇌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의 열정적인 학습공간이다. 이 모임을 이끌어온 박문호 박사는 2003년 ‘과학독서 운동’에 이어 2009년에는 ‘137억 년 우주의 진화’, ‘특별한 뇌과학’ 등 빅히스토리 수업을 시작해 20년째 진행하고 있다.
수업만 800여 시간. 코로나 전까지는 매주 일요일 2시부터 6시까지 수업을 진행했고, 그동안 박자세 수업에 참여한 인원은 2천 명이 넘는다.
수업내용은 전문가 수준이다. 우주론, 일반상대성이론, 천체물리학, 천문학, 양자역학, 지질학, 암석학, 생화학, 생리학, 분자세포생물학, 유전학, 진화학, 신경과학(뇌과학), 신경해부학, 동물학, 식물학, 해양학, 기후학, 입자물리학, 세포학 등 자연과학 분야를 망라한다. 박자세에서 공부하는 이들은 교수부터 직장인, 주부, 의료인, 학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박문호 박사의 강의는 PT 없이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자료를 직접 화이트보드에 판서하면서 전달한다. 수업에 참여하는 학습자에게도 뇌의 구조와 기능을 직접 그리면서 익히기를 강조한다. 그의 저서 《그림으로 읽는 뇌과학의 모든 것》에는 박자세 수업에서 직접 그린 뇌 그림들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 뇌과학 분야의 석학인 조장희 박사는 박자세 수업에 대해 “핵심 뇌 이미지 10장을 일반인들이 그려내는 현장을 보고 감명 받았다. 뇌의 구조를 모르고 감정과 기억에 대한 상식 수준의 생각만 되풀이하기보다는 뇌 구조를 한 번이라도 그려보는 것이 더 효과적인 인간 이해의 지름길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뇌 공부 열기는 인간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열망의 반영
박문호 박사의 본래 전공 분야는 전자공학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밤하늘에 떠 있는 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미국 유학시절 대학에 천문대가 있어 천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뇌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세포 단위까지 관심을 가져야 생명현상을 이해할 수 있으니 우주의 탄생과 소멸과 변화를 탐구하는 천문학과 뇌과학의 연결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가 2008년에 펴낸 《뇌, 생각의 출현》은 우주 탄생부터 시작해 세포의 생명활동, 의식현상에 이르기까지 우주와 생명현상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담고 있다.
“과학을 통해 들여다보아야 합리적 사유가 가능하고, 뇌를 이해하면 많은 것들이 해소된다”고 믿는 박문호 박사의 과학 대중화 운동은 ‘박자세’를 통해 차분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불안에 잠식 당하지 않는 방법은 세상 만사의 본질을 보는 것이다.
뇌과학 책을 읽고 뇌를 그리며 구조와 기능을 익히는 뇌 공부의 열기는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열망의 반영일 터이다.
“우리는 뇌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을 통해 희미하게 나마 우리를 포함한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금세기 최고의 진보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일임을 깨닫기 시작했다.”《인간의 뇌와 학습(Human Brain and Human Learning)》의 저자 레슬리 하트Leslie A. Hart의 이 같은 통찰이 유의미한 이유다.
글. 장래혁 브레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