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세포를 원하는 세포로 유도하거나 면역세포의 염증 반응을 조절하려면 어떤 유전자를 작동시켜야 할까. 국내 연구진이 유전자를 영구적으로 조작하지 않고 단 한 번의 자극만으로 세포를 원하는 상태로 유도하는 범용 세포 제어 기술을 개발했다.
KAIST(총장 배충식)는 바이오및뇌공학과 조광현 교수 연구팀이 세포 내부의 유전자 조절 흐름을 활용해, 최소한의 일시적 개입으로 세포의 운명을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원천기술 ‘넛지(NUDGE)’를 개발했다고 23일 밝혔다.
▲ 좌측 상단은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페리오 브라마나 석사(공동 제1저자). 단체사진은 이우정 박사과정생(공저자), 조광현 교수, 코빈 하퍼 박사과정생(공동 제1저자) [사진=KAIST 제공]
세포의 운명을 바꾸는 기술은 줄기세포를 특정 세포로 분화시키거나 질병·노화 세포를 정상 상태로 되돌릴 수 있어 난치병 치료와 재생의학의 핵심 분야로 꼽힌다. 예를 들어 줄기세포가 심장세포나 신경세포처럼 특정 기능과 형태를 갖춘 세포로 변하는 과정이 분화다.
기존의 세포 운명 제어 방식은 특정 유전자를 지속해서 켜거나 끈 상태로 고정하는 ‘영구적 개입(permanent intervention)’에 주로 의존했다. 이는 목표 상태를 구현할 수는 있지만,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세포의 유연성인 ‘가소성(plasticity)’을 떨어뜨리는 한계가 있었다. 더불어 자연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세포가 만들어질 위험성도 존재했다.
연구팀은 세포를 강제로 고정하는 대신, 단 한 차례의 일시적 자극으로 세포가 스스로 목표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막힌 물길을 잠깐 터주면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세포 내부에 존재하는 유전자 조절 흐름을 목표 방향으로 살짝 유도하는 전략이다.
연구팀이 개발한 ‘넛지(NUDGE, natural dynamics control of gene regulatory networks)’는 컴퓨터 논리 모델을 통해 세포 내 주요 유전자들의 상호작용과 장기적인 상태 변화를 분석한다. 이어 유전자 간 작동 관계를 나타내는 논리함수를 수학적으로 분해해, 현재 세포를 목표 상태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제어 인자 조합을 찾아낸다.
예를 들어 줄기세포를 심근세포로 분화시킬 때, 수많은 유전자 중 어떤 표적 분자를 일시적으로 자극해야 하는지 제시하는 ‘최소 자극 설계도’ 역할을 하는 셈이다.
특히 가능한 최소 제어 조합을 빠짐없이 찾아내고 이를 수학적으로 보증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연구팀은 대규모 분자 네트워크에 적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근사 기법도 함께 제시했다.
넛지는 자극 대상을 찾는 데 그치지 않고, 자극받은 세포가 어떤 경로를 거쳐 목표 상태에 도달하는지, 해당 상태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도 분석한다. 세포 변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상태가 나타날 가능성까지 사전에 예견할 수 있다.
연구팀은 기존에 보고된 63개의 생물학적 네트워크에 넛지 기술을 적용해 성능을 검증했다.
분석 결과, 유전자를 영구 고정하는 기존 방식은 63개 네트워크 중 55개에서 세포 유연성을 훼손하거나 비정상적인 평형상태를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넛지의 최소 제어 방식은 전체 네트워크의 90% 이상에서 오차가 0.01 미만일 정도로 높은 정확도를 보였다. 가장 효과적인 최소 개입 조합 역시 83%의 높은 확률로 도출해 냈다.
나아가 연구팀은 심근세포 분화, 알레르기 반응 관여 비만세포의 운명 결정, 대식세포의 항염증 상태 전환 등 서로 다른 세 가지 생명현상에 넛지를 적용해 실효성을 확인했다.
심근세포 분화 과정에서는 심장 발생과 재생에 중요한 ‘MESP1’이 초기에 잠깐 작동한 뒤 성숙한 심근세포에서는 사라지는 실제 생명현상을 재현했다. 특정 유전자를 계속 켜두지 않고 일시적으로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세포가 자연스러운 분화 과정을 따라감을 입증한 결과다.
비만세포 형성과정에서는 ‘GATA2’와 ‘GATA1’이 세포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 지점임을 확인했다. 대식세포 연구에서는 정상 면역 기능을 유지하면서 염증을 줄이는 ‘M2’ 상태로 전환하기 위한 IL-4 등 최적의 1회성 일시적 제어 전략을 도출했다.
이번 기술은 특정 질병이나 특정 세포에만 국한되는 치료법이 아니라, 연구자가 원하는 상태로 세포를 바꾸기 위해 ‘어느 지점을 한 번 자극해야 하는지’ 찾아주는 범용 원천기술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향후 줄기세포 분화 유도, 질병·노화 세포 정상화, 손상 조직 재생, 면역반응 조절, 암세포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는 가역 치료 전략 설계 등 다양한 분야에 폭넓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 연구 이미지 (AI 생성) [그림=KAIST 제공]
조광현 교수는 “넛지는 단 한 번의 최소한의 자극으로 현재 세포를 원하는 상태로 유도하는 범용 세포 제어 기술”이라며 “줄기세포 분화부터 노화·자가면역질환·재생의학·암 가역 치료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제어 전략을 설계하는 원천기술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연구에는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페리오 브라마나(Ferio Brahmana) 석사와 코빈 하퍼(Corbin Hopper) 박사과정생이 공동 제1저자로, 이우정 박사과정생이 공저자로 참여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온라인판 9월 18일 자에 게재됐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중견연구사업 및 기초연구실지원사업 등의 지원으로 수행됐다.
글. 우정남 기자 insight159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