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 북스] 운명의 과학

[브레인 북스] 운명의 과학

뇌는 어떻게 우리의 운명을 만드는가


타고난 유전자, 주어진 환경, 무의식적 본능 속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우생학이 참혹한 비극을 남긴 뒤, ‘인간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믿음이 전 세계인들에게 자리 잡았다. 마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선언처럼 말이다. 

1990년대에는 신경 가소성 개념이 확산되면서, ‘누구나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상식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 익숙한 믿음을 다시 뒤흔들고 있다. 성격, 회복탄력성, 불안 성향 등 인간의 핵심 특성을 분석한 여러 연구에서 유전적 영향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모든 것이 유전자가 결정한다’는 극단적 결정론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걸까? 영국 왕립 과학위원회가 선정한 ‘영국을 대표하는 현역 과학자 100인’이자 《네이처》가 꼽은 ‘떠오르는 스타 생물학자’인 저자는 오히려 그 반대의 답을 내놓는다. 타고난 한계를 이해하는 순간 오히려 진짜 자유의지를 발휘할 공간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첫 대중서인 《운명의 과학》에서 각 분야 최전선 연구자들과 나눈 인터뷰와 여러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유전·환경·무의식이 우리의 성향과 선택에 어떤 방식으로 스며드는지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어디까지가 정해진 운명이고 또 내 몫인지’를 보다 선명하게 인지하고, 삶을 더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아는 현실과 뇌가 만든 현실

왜 배가 부른데도 디저트는 포기하기 어려울까?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상황에서도 덤덤한 사람과 불안에 떠는 사람은 어떤 점이 다른 걸까? 이 책은 식욕, 사랑, 애착, 개인의 신념처럼 우리 일상과 맞닿아 있는 주제를 따라가며 뇌가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 먹고 싶은 음식에는 이미 태아기 때 노출된 환경의 흔적이 스며 있고,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라기보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이 주고받는 정교한 신호에 가깝다. 부모의 육아 본능 역시 어느 한쪽 성만의 특권이 아니라 유전자·호르몬·환경이 함께 빚어낸 신경화학적 행동이다. 

70억 명이 같은 세상에서 살지만 각자의 뇌는 70억 개의 서로 다른 현실을 구성하며, 우리가 객관적인 세계라고 믿는 것조차 사실은 뇌가 정보를 선별하고 재구성한 결과에 가깝다. 

이 모든 과정의 상당 부분은 의식이 닿지 않는 깊은 무의식에서 진행된다. 샌드위치 하나를 고르는 단순한 순간에도 뇌의 회로, 생물학적 욕구, 과거의 학습이 겹겹이 영향을 미친다.

이 책은 이러한 유전자의 영향과 뇌의 작동 방식을 최신 연구와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풀어내며, 전문 지식이 없어도 “왜 나는 이렇게 느끼고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이끈다.

운명을 직시하는 순간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망설일 때, 회의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결정할 때 우리는 자신이 내린 모든 선택이 자기 의지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만약 이 선택들이 내가 자각하기도 전에 뇌 속에서 이미 정해진 답이었다면 어떨까? 좋아하는 취향, 반복되는 실수, 특정 상황에서의 충동까지도 보이지 않는 DNA와 뇌의 규칙에 따라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점은 많은 이가 자신의 생물학적 성향을 알게 되면 처음엔 반발하다가 곧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유전자가 정해놨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제한해 버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생각을 뒤집자고 제안한다. 유전자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적지까지 정하는 것은 아니다. 뇌는 같은 조건 안에서도 정보를 다시 해석하고, 여러 가능성을 비교하며,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구분한 뒤 그 여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일이다. ‘나는 불안에 취약한 성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무작정 버티기보다 나에게 맞는 전략을 찾게 되고, ‘나는 과식하기 쉬운 뇌를 가졌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정신력만 믿지 않고 현실적인 식습관을 설계하게 된다.

이 책이 출간 즉시 《선데이 타임스》와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8개국에서 번역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운명론에 빠지지도 않으면서도 ‘마음먹으면 다 된다’는 식의 공허한 위로에 기대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어떤 조건 위에 서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선택을 설계하도록 이끈다. 타고난 조건과 바꿀 수 있는 현실의 경계에서 삶을 다시 설계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가장 든든한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글. 우정남 기자 insight159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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