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영어 유치원 또는 영어 학원 입학 시험을 뜻하는 ‘4세 고시’ ‘7세 고시’는 어느새 우리나라에서 조기교육 트렌드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미리 공부해두어야 나중에 명문대 진학에 유리하다’는 믿음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신앙처럼 자리매김한 탓이다.
그러나 이같은 어른들의 굳은 믿음과는 달리, 지나치게 일찍부터 가해지는 인지 자극과 지속적 스트레스는 전두엽 발달을 가로막으며 아이 뇌를 ‘학습 모드’ 대신 ‘생존 모드’에 돌입하도록 만든다. 일찍부터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려는 부모의 열심이, 역설적으로 아이의 뇌 발달을 방해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너무 빨리 배우는 아이들』은 우리나라 소아정신의학의 최고 권위자인 저자가 30년의 임상 경험과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때 이른 학습이 낳는 폐해를 입체적으로 짚어낸 책이다.
“인간의 뇌는 DNA에 입력된 순서에 따라 발달하게끔 설계되어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아이 뇌에 새겨진 고유한 발달단계를 무시한 배움이 어떻게 인지력을 무너뜨리는지, 유년기에 부실하게 성장한 뇌가 사춘기와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예리하게 조명한다.
이밖에 전두엽과 변연계, 시냅스와 보상회로를 비롯해 스트레스와 정서 조절 및 회복 강화, 인지력 좋은 아이의 뇌에 숨은 비밀 등 철저하게 뇌 과학의 관점에서 균형 잡힌 뇌 발달을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들을 밝혀나간다.
아이들이 가진 뇌의 잠재력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뇌가 준비되어 있을 때’ 비로소 발휘된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 사용할 뇌의 기초를 다지는 영유아기에 조기교육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뇌 발달이다. 이제 불안함과 조급함은 내려놓고 이 책을 따라가며 흔들리지 않는 뇌 양육 원칙을 세워보자.
‘4세 고시’ ‘7세 고시’는 우리 아이들의 뇌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유명 영어 유치원 입학 시험과 대형 학원 레벨 테스트를 뜻하는 ‘4세 고시’ 혹은 ‘7세 고시’는 우리 사회의 조기교육 광풍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저귀도 떼지 않은 만 2세 아이들, 기껏해야 이제 막 유아 티를 벗은 만 5~6세 아이들이 수험생처럼 빡빡한 스케줄에 맞춰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다.
최근 정부가 ‘유아 사교육 경감 방안’을 발표하며 레벨 테스트와 장시간 교육에 규제의 칼을 빼 들었지만, 사교육 기관들은 주니어 토플(TOEFL) 점수나 외부 공인 인증 성적표를 요구하는 변칙 형태로 그물망을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다.
물론 요즘 부모들이 이 기형적인 속도전에 동참하는 데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최대한 어릴 때부터 미리 영어를 해두어야 나중에 수학 등 다른 과목에 전념할 시간을 번다”거나 “지금 상위권 트랙에 타지 못하면 영영 뒤처진다”라는 불안함을 야기하는 입시제도, 한 번 삐끗하면 패자부활전이 힘든 한국 사회 특유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안전한 길을 열어주고 싶은 부모를 마냥 비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 과연 영유아기 조기교육은 입시의 승부처인 중·고등학교까지 그대로 이어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의 뇌는 어떠한 영향을 받을까?
30년 넘게 17만 명의 소아청소년을 진단·치료하며 아이들의 뇌 발달을 연구해 온 국내 최고 소아정신의학 권위자 천근아 교수는 이 과열된 조기교육 트렌드에 서늘한 경고를 보낸다.
저자는 영유아기에 이루어지는 도를 넘어선 학습이 장기적으로 아이들의 뇌에 어떤 치명적 손상을 남기는지를 낱낱이 조명하며, 평생 무너지지 않을 ‘균형 잡힌 뇌’를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을 상세히 전한다.
뇌의 ‘기초공사’가 이루어지는 영유아기, 과도한 인지적 자극이 불러오는 ‘시냅스 가지치기 오류’
인간의 뇌에서 고차원적인, 인간만의 특성과 기능을 갖추도록 하는 곳이 바로 ‘정서의 뇌(변연계)’와 ‘이성의 뇌’다. 이 두 영역의 성숙도에 따라 건강하고 효율적인 뇌가 만들어지는데, 영유아기는 특히 정서의 뇌가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시기다.
만약 1층에 해당하는 정서의 뇌가 탄탄하게 받쳐주지 못하면, 그 위에 이성의 뇌라는 고층 빌딩을 세울 수 없다. 게다가 뇌는 일단 한번 손상되면 구조와 기능 자체가 손상될 수 있어 ‘나중에 회복하면 되지’, ‘이 부분부터 발달시키고 나중에 보충하면 되지’라는 논리가 절대 통하지 않는다.
특히 영유아기는 효율적인 뇌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불필요한 신경망을 정리하는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가 맹렬히 일어나는 뇌 최적화의 시기다. 이때 발달단계에 맞지 않는 무리한 자극이 들어오면, 뇌는 제거해야 할 시냅스는 남겨두고 오히려 정교화해야 할 회로를 잘라내는 ‘가지치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는 해마와 전두엽 발달을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원인이 되며, 결과적으로 정보를 가공하는 ‘작업 기억’의 용량을 초과해 심각한 인지적 과부하를 일으킨다. 이처럼 발달단계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인지 자극이 꼭 필요한 시냅스 가지치기를 방해하고 산만한 뇌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가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면 문제없는 것 아닌가요?”
착각에 빠진 부모에게 아이 뇌가 보이는 ‘생존 모드’
조기교육의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 앞에 이렇게 반문하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는 가르치면 재미있다고 좋아하는데요? 아이가 잘 따라오기만 하면 아무 문제없는 것 아닌가요?” 이에 대해 천근아 교수는 아이가 순응하는 것을 즐겁게 학습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착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영유아기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정밀하게 깨닫고 표현하는 능력이 미숙하다. 이보다는 세상의 전부인 부모를 기쁘게 하려는 본능적인 인정 욕구가 강하며, 거부했을 때 사랑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근원적 두려움 때문에 진짜 마음을 숨긴 채 억지로 따르는 경우가 많다.
더 큰 문제는 마음에 쌓인 심리적 고통이 아이 뇌를 생물학적으로 변형시킨다는 사실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는 뇌의 편도체를 과도하게 자극한다.
이로 인해 몸속 위기 대응 체계가 가동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잉 분비되어 장기 기억의 핵심인 해마를 위축시키고 전전두엽 기능을 마비시킨다. 뇌가 집중력을 발휘하는 ‘학습 모드’ 스위치를 끄고 당장의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는 ‘생존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렇게 뇌가 생존 모드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늘 높은 불안과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 보니 두통과 복통, 야뇨증, 불면증 같은 ‘신체화(somatization) 증상’으로 나타난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복통이나 두통을 호소해 병원에 갔다가 검사 결과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일이 반복되면서 소아정신과를 찾아오는 현상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처럼 너무 빠른 배움은 장기적으로 아이의 뇌를 스트레스에 취약한 상태로 바꿀 수 있다.
부실하게 성장한 영유아기의 뇌, 폭주하는 사춘기를 부른다
영유아기에 정서의 뇌라는 기반이 부실하게 지어질 경우, 아이가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는 사춘기에 이르러 학업 성취의 저하뿐만 아니라 ‘폭주하는 청소년기’를 불러온다. 10대의 뇌는 최신 스포츠카의 엔진과 구식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함께 갖고 있는 자동차와 같다. 감정과 본능을 관장하는 액셀(변연계)은 최신 스포츠카 수준으로 발달하는 반면, 이를 제어할 브레이크(전두엽)는 턱없이 미성숙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본래 유년기에 다져진 정서의 뇌는 사춘기라는 거대한 충격을 흡수하는 핵심 완충장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이 보호막이 부실한 아이들은 2차 시냅스 가지치기와 호르몬 폭풍 등 이 시기에 일어나는 변화무쌍한 뇌의 변화를 견뎌내지 못한다.
이로 인해 내적 회복탄력성이 무너져 있기에 아주 작은 학업적 실패나 좌절에도 쉽게 무너지며 극단적인 반항과 무기력으로 도피하기 쉽다. 특히 자율성을 빼앗긴 채 부모의 통제 속에서 자란 아이일수록, 내면에 쌓인 스트레스가 호르몬 폭풍과 충돌하면서 부모와의 대립은 극에 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영유아기에 정서의 뇌를 발달시킬 기회를 놓친 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천근아 교수는 아이의 거친 공격성을 엇나간 반항이 아닌, 억눌렸던 뇌가 자율성을 찾기 위해 보내는 ‘처절한 발달 신호’로 재해석하라고 조언한다.
부모가 과도한 통제를 내려놓고 아이 내면에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를 읽어내 줄 때, 사춘기 뇌의 위태로운 오작동을 비로소 완화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평생 가져갈 아이의 뇌, 균형 잡힌 발달을 위하여
인간의 뇌 발달은 인류가 수백만 년간 진화시키고 DNA에 새겨놓은 타협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영유아기 양육의 본질은 언제든 휘발될 단편적인 지식이나 눈에 보이는 성취가 아니라, 어떤 문제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는 ‘공부 욕구(내적 동기)’와 스스로 끝끝내 해내는 ‘끈기(자기 조절력)’ 같은 내적 역량이 자라날 뇌의 생물학적 지반을 튼튼히 다지는 데 있다.
따라서 성장기에 부모가 신경 써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전두엽의 자기 조절력과 몰입 회로를 조화롭게 발달시키는 일이다. 일상 속 스킨십과 오감 자극으로 뇌를 고르게 깨우고, 타고난 기질을 수용하며 발달단계에 맞는 훈육의 방법을 조절하며, 숏폼이라는 자극적 위협으로부터 두뇌 생태계를 안전하게 지켜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조화로운 기반 위에서만 아이는 스스로 무언가를 배우며 갈망하는 동시에, 고차원적 인지 능력을 탄탄하게 완성해나갈 수 있다.
천근아 교수는 “준비되지 않은 뇌에 주어지는 불필요한 자극은 오히려 뇌의 잠재력을 사장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라고 강력히 경고한다.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부모의 조급함이 아이의 뇌가 스스로 기틀을 다지고 단단해질 기회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변의 말이나 트렌드에 흔들리는 대신 아이 뇌의 타고난 발달단계를 믿어야 한다는 이 책의 메시지는, 보이는 성과에 조급해하며 유년기의 본질을 외면해온 부모들에게 뼈아픈 충고와 함께 냉철한 조언을 선사한다.
글. 우정남 기자 insight159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