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은 그저 소리가 아니다. 정신의 산물이다. 말 속에 정신의 뿌리가 있으며, 말이 문화의 근간이다. 우리말은 일본, 중국, 미국과는 다른 한국인만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은 채 긴 역사를 관통하며 전해졌으니, 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정신의 뿌리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언어학자도 아닌 저자가 우리말 책을 쓰게 된 이유이다. 다양한 이력만큼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해왔지만 일지 이승헌 총장의 한결같은 관심은 개인과 사회, 나아가 인류의 건강을 증진하고 의식을 깨우며, 현대 물질문명을 극복한 새로운 정신문화를 개척하는 일이다. ‘지금 여기’에서 나와 우리가 겪는 문제를 진단하고 그 실천적인 해법과 대안을 제시할 때 저자는 늘 우리 민족 고유의 홍익철학을 기반으로 한 조화와 상생의 가치를 강조해왔다. 이번 책도 같은 맥락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인간 정신의 경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말의 가치에 주목했고, 우리말에 깃든 놀랍고도 위대한 정신의 세계를 만났다. 또한 우리말의 참뜻과 내재한 힘을 깨우치면 누구라도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건강, 행복,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저자가 우리 문화를 되짚고, 우리말을 거슬러 오르며 만난 우리 정신의 뿌리가 ‘얼’이었다고 한다. 얼에서 우리말이 나오고, 우리말을 통해 한국인의 사유 체계가 만들어졌으며, 그 정신에서 한국의 문화가 일어났기에 우리 말과 문화를 ‘얼의 언어, 얼의 문화’라고 한다는 것이다.
‘얼’이 대체 무엇이기에?
저자가 강조하는 ‘얼’이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말 ‘얼’은 한자말 ‘정신’과 대개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정확히 구분하자면 정신 중에서도 가장 핵심을 이루는 의식의 본질을 말한다. 정신이 생각, 정서, 감정과 같은 온갖 종류의 의식을 포괄하는 데 비해, 얼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생명의 뿌리에 잇닿아 있는 의식으로 본다. 저자는 얼에 아주 가까운 의식으로 ‘양심’이나 ‘신성神性’을 든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에 얼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치, 경제, 교육, 환경 등 지금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가 우리 삶의 중심에서 ‘얼’이 사라져버린 탓이라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얼빠진 세상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얼을 되찾지 않고서는 얼빠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붙들고 아무리 씨름해봐야 힘만 소진할 뿐 해결책을 찾을 도리가 없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고대에서부터 이 땅에 펼쳐졌던 위대한 얼의 문화에 대해 모르는 것은 물론 얼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조차 잊어버렸다. 그런데 이를 문제 삼기는커녕 얼의 실종을 알아채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얼을 찾으면, 얼이 살면 우리가 처한 숱한 문제들을 함께 풀어갈 수 있는 동력이 우리 안에서 힘차게 솟구칠 텐데 그것이 안 되고 있으니 얼마나 애가 타는지 모른다.”
저자는 우리 정신문화를 이룬 뿌리 역사의 가치를 통찰하지 못하는 현실을 통탄스러워 하며, 우리말을 통해 직관적으로 얻은 통찰과 혜안을 책 속에 풀어놓고 있다.
웅숭깊고 웅혼한 우리말의 힘
우리말은 얼에 뿌리를 내리고 얼의 생명력을 취하며 스스로 얼의 문화를 키웠고, 그 문화의 힘으로 오랜 세월을 관통해 지금에 이르렀다는데, 저자가 풀이해내는 우리말의 면면이 꽤나 흥미롭다.
우리 문화에서는 예로부터 얼굴을 중시해서 ‘명예’나 ‘양심’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실수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면 ‘얼굴을 못 들겠어’ ‘무슨 얼굴로 보나’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렇다. 저자는 우리말 ‘얼굴’을‘얼이 드나드는 굴’ 또는 ‘얼이 깃든 골’이라고 풀이한다. ‘얼간이’는 얼이 나간 사람, ‘어리석다’는 얼이 썩었다는 뜻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 어른, 어르신’은 사람의 일생을 얼이 완성되는 과정으로 본 우리 문화에서 얼이 얼마나 알차게 영글었는가에 따라 달리 부른 말이라고 한다.
또 ‘고맙습니다’와 ‘반갑습니다’는 ‘신神’을 뜻하는 우리말 ‘고마’와 ‘반’에서 파생된 말로, ‘당신은 신과 같습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상대방을 신과 같이 크고 밝은 존재로 존중한다는 뜻으로, 인간의 본성을 태양처럼 크고 밝은 존재로 인식한 우리의 뿌리 정신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좋다’는 주위와 조화로운 상태이며, ‘나쁜’은 주위에 대한 배려와 존중 없이 나밖에 모르는 ‘나뿐’인 상태를 말한다고 풀이한다. 한민족의 노래로 널리 불려지는 ‘아리랑’은 떠나간 임을 원망하는 ‘한’의 정서를 담은 게 아니라 ‘참나(얼, 본성)를 찾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는 통찰도 흥미롭다.
우리말에 대한 저자의 이런 풀이는 학문적인 근거를 떠나 우리말의 웅숭깊고 웅혼한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곳곳에 삽입된 웹툰 작가 호연의 만화도 책을 보는 재미를 더한다.
글. 조채영 기자 chaengi@brainworl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