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위대한 첫 승리’

[칼럼] ‘위대한 첫 승리’

장영주의 파워브레인

▲ 그림 = 원암 장영주


  2025년 6월 3일.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제 21대 대통령 선거가 턱밑까지 다가왔다. 그 어느 때보다 국민들 한명 한명의 강렬한 ‘필사즉생’의 신념과 의지의 발현이 절실한 때이다. 

 1598년 5월 7일 정오경 시작된 옥포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은 승리를 이룬다. 조선의 육지에서는 평안도 턱 끝까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지만 조선의 바다에서만큼은 연전연승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수군의 압도척인 대공세에 맞선 첫 해전에서 실로 위대한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 

임진왜란 시작부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에 성공한 일본군은 부산포 일원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겁에 질린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함은 자침하고 수영을 불태우고 물러났다. 경상 좌병사 이각은 자신이 지휘해야 할 울산의 경상 좌병영 군사들을 내버린 후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왜군함대는 무인지경으로 경상도 남해안을 유린하면서 서쪽으로 쾌속진격을 거듭하고 있었다. 경상도 해역에 인접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수군함대는 수시로 일본군의 침공 소식을 접한다. 

장군은 여수 앞 바다에 전 병력과 함선을 집결하고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의 급한 구원 요청을 받았으나 담당 해역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4월 27일, 전라좌수영군은 조정의 허락을 받고서야 경상우수영군과 연합함대를 출동하는데 이 며칠의 전략적 지연이 후일 원균의 모함사유가 되기도 한다. 

이순신 장군은 치밀한 막바지 준비 후 5월 3일, 중위장을 불러 4일 새벽에 출항할 것을 약속한다. 출전하기 전 달아난 여도 수군 ‘황옥천’을 잡아다 머리를 높이 걸어 군율의 엄정함을 전 진중에 떨친다. 

장군은 함대를 이끌고 1582년 5월 5일(음) 새벽, 여수를 출발하니 첫 출전으로 임진왜란 발발 후 약 20여 일이 지난 후이다. 전라좌수영의 1만5천명의 병력 중 후방수비와 행정지원 병력을 제외한 5천여 명이 출전한다. 전함은 주력 전함 판옥선 24척, 중형 협선 15척, 소형 포작선 46척 등 85척으로 구성되었다. 

오래전부터 전쟁을 예감한 이순신은 왜란 발발 하루 전 거북선을 바다에 띄울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규모였다.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 판옥선 4척, 협선 2척이 당포에서 합류한다. 

평소 준비상태가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장면으로 통합함대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한다. 전쟁 내내 용의주도하게 첩보습득을 중시한 한 장군은 날랜 사도 첨사 ‘김 완’과 여도 권관 ‘김인영’을 척후대로 보낸다. 

5월 7일 정오경 과연 적 선단을 발견한 척후대는 신기전을 쏘아 올린다. 대소 선박 50여척의 일본군 함대는 경상도 서쪽해안으로 진출하던 중에 해안에 상륙하여 인근 촌락을 약탈하고 있었다. 

실전이 전무한 이순신의 수군은 일본 수군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적과 처음으로 맞닥뜨린 조선 수군들을 몹시 두려웠을 것이다. 이순신은 휘하의 장졸들에게 엄하게 명령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이어 옥포 포구의 적을 향해 대열을 지어 쳐들어간다. 이순신의 지휘 하에 조선 전 수군은 모두 순식간에 일본 전선을 포위하고 강력한 바람과 우레같이 총통과 활을 퍼부었다. 처음 보는 조선함대의 위용과 천지를 뒤흔드는 포격에 일본군의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전술은 빠른 배로 적선을 따라잡고 월선하여 살육전으로 배를 점령하는 ‘월선육박전’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접근 할 수 없는 거리에서 벼락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화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처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지휘관과 호위선 몇 대는 해안선을 따라 탈출을 시도하였다. 포위망이 더욱 압축되자 나머지는 배를 버리고 해안에 상륙하여 산 속으로 도주하였다.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대소 함정 26척을 격침시킨 반면 조선수군은 피해가 전혀 없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포로였던 백성들도 구출한다.  

 ‘옥포해전’의 왜군 지휘관은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로 일본군에서는 유명한 장군이었다. 명량에서 다시 이순신을 만나 손등에 화살을 맞고 도망갈 정도로 연패한다.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의 시작이 바로 거제도 ‘옥포해전’이다. 그날의 상황은 선조에게 올리는 장계 「옥포파왜병장」에 소상하게 기록 되어 있다. 자신보다 부하들의 이름과 함께 전공을 선조에게 세세하게 적어 올린다. 

“-전략-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에 이르니 날이 저물기로 밤에 지냈습니다. 그리고 7일 새벽에 일제히 출발하여 적선들이 머물고 있는 천성 가덕을 향하여 가다가 정오쯤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사변을 알리므로 적선이 있는 줄을 알고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신칙하되 '망령되이 움직이지들 말고 산과 같이 정중하라'고 전령한 뒤 그 포구 앞바다로 열을 지어 들어간 즉, 왜선 30여 척이 옥포 선창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큰 배는 사면에 온갖 무늬를 그린 비단 휘장을 둘러치고, 그 휘장 기에는 긴 대를 꽂았으며, 붉고 흰 작은 깃발을 어지러이 매달았는데 깃발 모양은 여러 가지요, 모두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바람결에 따라 펄럭이며 바라보기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왜적의 무리들이 그 포구로 들어가 분탕질을 쳐서 연기가 온 산에 가득 찼는데, 우리 군함들을 돌아보고서는 엎치락뒤치락 하며 어쩔 줄을 모르면서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며 노를 바삐 저어 바다 가운데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을 타고서 배를 저어 가는데, 6척이 선봉에 서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일심으로 분발하여 모두 죽을힘을 다하니 또 배에 있던 관원과 군사들까지도 역시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죽음으로써 기약하는 것이었습니다. -후략-” 

이순신 함대는 왜적을 추격해 영등포를 거쳐 합포에서 5척, 다음 날 적진포에서 11척을 각각 분멸하고 9일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 장대한 승리의 기운은 두 달 뒤, 인류 역사상 ‘세계 4대 해전’으로 알려진 한산대첩으로 이어진다. 

결국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수많은 조선수군의 거룩한 목숨을 담보로 나라는 겨우 연명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호가 마침내 암울한 터널을 벗어나 자유와 번영을 향해 안전하고 거침없이 항해할 수 있도록 끝내 위대한 첫 승리를 거두어 내야만 한다. 국민의 몫이다.  

글. 원암 장영주 화가, 글로벌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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