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을 넘어서며 1200만 명을 돌파했다.
천만 영화는 2023년 <서울의 봄> 이후 2년 만에, 사극으로는 <명랑> 이후 12년 만이라 한다. 몇 년간 침체해 있던 극장가에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 비치듯 다시 살아나는 듯해 오랜만에 영화계가 들떠있는 것 같다.
뒤늦게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사실 영화보다 영화를 연출한 장항준 감독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큰 호기심이 생겼다.
▲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지난 6월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사진=쇼박스]
장항준 감독은 드라마 작가 김은희의 남편으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본업은 김은희 작가 남편, 부업은 영화감독”이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잘나가는 아내를 둔 남편으로서 피해의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돈 잘 버는 아내 카드 쓰는 내가 부럽지?’라며 능력 있는 배우자를 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겸손함이 미덕인 한국 미디어 환경을 감안하며 매우 이례적이다.
덧붙여 자신을 스스로 ‘신이 내린 팔자’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 좋은 부모님 밑에서 사랑 듬뿍 받고 자랐죠. 돈 없는 백수 시절에는 재워주고 먹여주는 좋은 친구가 있었고, 결혼하고 나니 능력 있는 돈 잘 버는 아내와 예쁜 딸 있죠. 얼마나 행복한 인생입니까?
마냥 해맑고 가벼워 보이는 그에겐 ‘눈물자국 없는 말티즈’라는 애칭까지 생겼다.
그런데 대중들은 신기하게도 그를 싫어하기는커녕 환호했다.
장항준 감독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고통이나 시련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2023년 개봉한 영화 <리바운드>는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는 5년이라는 시간을 이 영화에 투자했다고 한다.
크게 기대했던 터라 영화 개봉 후 평단과 관객의 반응을 보고, 택시 안에서 김은희 작가의 무릎 위에 누워 펑펑 울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후의 행보는 그가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보통은 흥행에 실패하면 감독 스스로를 탓하거나, 혹은 속으로 남을 탓하면서도 겉으로는 "제 부족함입니다"라고 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장항준 감독은 달랐다. 그는 영화가 잘 안된 건 대중들 탓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감독인 본인 포함 출연진, 영화의 모든 스태프는 최선을 다했는데 영화가 잘 안된 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대중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말을 글로 옮기다 보면 오해가 생길 수 있어 장항준 감독의 발언을 직접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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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대해 자책하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장항준 감독은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일의 실패에 대해 자기 자신을 탓하지도, 남을 탓하지도 않았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잘되지 않았을 때 자기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았고, 함께 일한 사람들도 탓하지 않았다. 대신 어쩔 수 없는 결과에 대해 영화를 보러 오지 않은 관객을 탓하는 너스레를 떨었다.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사진=쇼박스]
이번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개봉을 앞두고 장항준 감독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 시장이 어렵기도 했지만, 손익분기점만 넘으면 좋겠다고 했다.
영화 홍보를 위해 출연한 한 라디오 방송에서 장 감독은 천만 관객까지는 바라지 않는다며 “천만 관객이 되면 개명하겠다, 전화번호를 바꾸겠다, 귀화하겠다, 요트에서 선상 파티를 하겠다”라며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공약 아닌 공약을 걸었다.
감독은 예상 못 했지만, 영화는 개봉 후 입소문을 타며 지난 6일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장항준 감독은 지난주 천만 공약을 수습하기 위해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다시 출연했다. 이번에도 역시 장항준 감독답게 말했다.
"공약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얼핏 무책임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한 마디에는 날카로운 역설이 담겨 있다.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하고도 모르는 척하는 수많은 공인들과 달리, 그는 오히려 '공약이란 원래 잘 안 지켜지는 것'이라는 현실을 유머로 먼저 인정해버렸다.
뻔뻔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솔직한 방식으로 상황을 수습한 셈이다. 개명도 이민도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대신 감사의 마음으로 시민들에게 커피차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했다.
▲ <왕과 사는 남자> 천만 관객 돌파 기념으로 배급사 쇼박스는 3월 12일 서울신문사 광장에서 커피차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사진=쇼박스]
아무리 잘난 척을 하고 남 탓을 해도 미워하기는커녕, 대중들은 ‘항준적 사고’라 부르며 좋아한다.
이처럼 그에게 사람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있어도 없는 척, 없어도 있어야 하는 척해야 하는 사회에서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그는 분명 한국 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캐릭터 임이 분명하다.
누구에게나 쓰라린 실패의 경험, 약자로 살아야 했던 시절은 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구하고, 실패했을 땐 최선을 다했으면 됐지라는 그의 태도는 분명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된다.
글. 전은애 기자 hspmak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