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일이 계기가 되어 지난해부터 피아노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 악기 연주로 감성 세포를 살려보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일주일 만에 감성보다 피아노 학원에서 지루함에 몸부림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하나의 곡을 그럴듯하게 연주하려면 오랜 훈련과 인고의 시간이 쌓여야 한다. 호수 위에서 유유자적 우아해 보이는 백조도 수면 아래에서는 쉼 없이 발차기를 하듯이 말이다.
다행히 어린 시절 지루함에 그만뒀다는 내 사정을 들은 선생님은 이미 나 같은 학생이 익숙한 듯 능숙하게 나를 피아노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연주곡 레퍼토리는 선생님이 지정한 2곡과 내가 선택한 1곡까지 총 3곡을 연주하는데, 레슨은 일주일 단 한 번 30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30분 레슨을 위해 최소 4~6시간가량 개인 연습 시간이 필요했다.
연습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유 있게 연습하겠다고 계획을 세워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겨 레슨 당일까지 한 번도 피아노 앞에 앉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 과정에서 삶의 중심 가치와 우선순위가 명확하지 않았던 내 일상이, 피아노 덕분에 통제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도파민을 자극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왜 클래식 피아노에 다시 심취하게 됐을까. 피아노 연주는 마치 깨야 할 레벨이 계속 나오는 게임처럼, 연주하고 싶은 곡과 새롭게 익혀야 할 주법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그리고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렇게 어렵게 작곡했는지 찾다가 보면 영화나 드라마 볼 시간이 없어지고, 유튜브 알고리즘은 어느새 피아노 연주 영상으로 가득 찼다.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건, 투자한 시간만큼 열 개의 손가락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눈앞의 음표만 쫓기 바빴던 손가락들이 뇌의 명령에 빠르게 반응해, 강약과 빠르고 느림, 격정과 애절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에는 노력만큼 결과가 정직했다. 책상 앞에 앉은 시간만큼 성적이 나왔고, 점심시간에 연습한 만큼 줄넘기 횟수가 늘었다. 그런데 성인이 된 후로는 시간과 돈, 마음을 쏟아도 결과가 마이너스가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의기투합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무산되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버티면 오를 거라 믿었던 주식도 그랬다.
그림, 조각, 글쓰기 같은 순수 창작은 더 복잡하다. '시간 = 결과물'이 바로 성립하지 않는다. 수많은 물레질을 거쳤지만 가마에서 깨지는 도자기, 끝내 마음에 안 드는 그림, 수십 문장을 써도 남는 건 한 문단뿐인 날들이 있다.
많은 시간 작업 한다고 해서 매번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매일 3시간 글을 쓴다고 해서 매일 좋은 글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분명한 건 1년 동안 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이다.
농사에 비유한다면 씨는 뿌렸는데 어디서 싹이 날지 모르고, 어떤 씨는 한참 후에야 열매를 맺고, 어떤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퇴비가 되는 것이다.
반면 피아노 연주 실력은 지금까지 '노력 = 보상'이라는 공식이 깨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야근한 날에도 경비 아저씨 눈치를 보며 늦은 시간까지 피아노 학원에서 연습할 의지가 생기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Beaty는 창의성이 뇌의 특정 영역이 아니라, 여러 신경회로가 상황에 따라 결합·분리·전환되는 'Brain Network Dynamics'를 통해 발현된다고 했다. 쉬거나 멍 때리기와 같이 내면의 생각에 잠길 때 활성화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 Default Mode Network)'와 보고서 작성처럼 외부 과제에 집중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보를 처리하고 통제할 때 활성화되는 '실행 통제 네트워크(ECN, Executive Control Network)'가 상황에 따라 협력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창의적인 생각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뇌 신경망들이 유연하게 전환되는 사이에서 싹튼다.
이 글을 쓰면서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떠올랐다. 5년 넘게 매일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나서, 밖에도 안 나가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부모님이 걱정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방 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 글 쓰는 일이 직업이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일 치던 피아노가 사라진 자리에서 뇌는 자연스럽게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목표 없이 멍하게 앉아 있던 그 시간이 창의적 사고를 위한 준비였던 셈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가 이렇게 나한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글_전은애 수석기자 hspmaker@gmail.com
참고 문헌
Beaty, R. E., Benedek, M., Silvia, P. J., & Schacter, D. L. (2016). Creative cognition and brain network dynamics. Trends in Cognitive Sciences, 20(2), 87–95.
https://www.cell.com/trends/cognitive-sciences/fulltext/S1364-6613(15)002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