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일 독립군 총재(제공=독립기념관)
한국과 일본의 전쟁 중에서 ‘청산리전쟁’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동안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이 영웅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상관은 서일이었다. 전쟁기념관은 “만주지역에서 항일문장투쟁을 벌이다가 순국한 서일 독립군 총재를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라고 밝혔다.
교육사업가에서 독립운동의 지휘자로
그는 누구인가? 초명은 기학(夔學), 호는 백포(白圃),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1881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서재운(徐在云)의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 김노규(金魯奎) 선생의 문하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주역을 공부한 후 1902년 함경북도 경성군 함일학교(咸一學校)를 졸업했다. 이후 1910년까지 교육사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한일병합이 되자 1911년 동만주 왕청현(王淸縣)으로 망명한다. 청일학교(靑一學校)와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해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교육구국활동을 전개했다. 이어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했다.
시교사(施敎師)로서 포교에 힘써 수만 명의 교우를 얻고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 전리(典理)와 총본사 전강(典講)이 되었고, 뒤이어 사교(司敎)가 되고 영선(靈選)에까지 올랐다.
서일은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약 1만 5천여 명의 단원을 거느린 단장으로 독립군 활동을 준비했다. 또한 만주로 들어오는 망명 의병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1918년 만주와 러시아령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민족대표 33인이 3.1 운동 때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보다 앞선 것이다. 전자는 무장항쟁을 담았다면, 후자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걸었다. 민족대표 33인은 이후 대부분 변절했다.
▲ 청산리전쟁 직후 기념사진(제공=독립기념관)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다!
서일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계화(桂和) 등과 함께 중광단을 정의단(正義團)으로 개편하여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신문을 간행하여 독립사상을 격려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0월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영을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두고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을 갖추었다.
1920년 청산리전쟁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 공적을 세웠다. 이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주력부대를 북만주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으로 이동했다. 국민회 독립군의 안무군(安武軍)‧홍범도군(洪範圖軍)‧광복단(光復團)‧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여러 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이는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길영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박사는 “서일이 단군민족주의를 내세워 결속을 다지고 항일투쟁의 의지를 극대화 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서일은 무기 구입과 운반 등 위험한 일을 솔선수범하는 등 사심 없이 항상 낮은 자세로 임했다. 그래서 독립군이 그의 인품에 감복하였고 수장의 자리도 조직원들의 추대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했다.
▲ 서일 총재가 이끌었던 북로군정서의 소총과 탄약, 숨겨놓은 수류탄 사진(제공=독립기념관)
그러나 자유시참변으로 타격을 입고 밀산에서 재기를 준비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수백 명의 토비(土匪)들의 야습을 받게 되자 다음날인 27일 서일은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로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