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를 조율하다

유전자를 조율하다

Bad to Good, Good to Great

브레인 27호
2011년 04월 20일 (수)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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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변하지 않을까? 우리는 ‘원래 이렇게 타고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과연 인간은 타고난 유전자대로 살 수밖에 없을까? 우리 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전자 결정론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쉽게 말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이 유전자 결정론이다. 유전학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인간의 이상행동, 정신적 장애, 식욕부진, 신경과민까지 모두 ‘특정한’ 유전자와 결부시켜 설명한다.

여성들이 쉽게 우울해지는 것은 우울증 유전자를 타고났기 때문이고, 거리에 폭력이 넘치는 것은 ‘폭력 유전자’나 ‘범죄 유전자’ 탓이며, 술꾼들은 ‘알코올중독 유전자’의 희생양이라는 식이다.


“내가 이런 것은 다 유전자 탓이야.” “내 유전자가 원래 그런 걸 어떡해?” 우리는 이런 말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한다. 신경과학자들과 유전학자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다 보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그럴까?

유전자는 고정불변일까?
1997년 캐나다 맥길대학의 마이클 미니 교수는 현대사회에 팽배해 있는 유전자 결정론이 과연 타당한지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는 생쥐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애정이 풍부한 어미 쥐의 새끼들은 애정이 풍부한 쥐로 성장하고, 냉담하고 예민한 어미가 낳은 새끼들은 냉담한 쥐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유전자 결정론에 힘을 실어주는 현상처럼 보였다. 미니 교수는 어미의 양육태도에 따라 새끼 쥐의 유전자가 변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애정이 풍부한 어미 쥐에게서 난 새끼들과 냉정한 어미 쥐에게서 난 새끼들을 바꿔치기했다.

유전자 결정론이 완벽한 이론이라면 환경이 바뀌어도 새끼 쥐들의 성향은 낳아준 어미 쥐의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새끼 쥐들은 물려받은 유전자와 상관없이 양육해준 어미 쥐의 성향을 따랐다.

애정이 풍부한 어미에게 입양된 쥐들은 애정이 풍부한 쥐로 성장했고, 냉정한 어미에게 입양된 쥐들은 냉정한 쥐로 성장했다. 유전자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미니 교수의 실험은 2006년에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메릴랜드대학의 과학자들이 엄마와 유아 185쌍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 엄마로부터 보살핌을 적게 받은 유아들은 세심하게 돌본 유아들에 비해 공포감이나 스트레스에 민감했고, 놀이 집중시간이 짧았으며, 전두엽 영역의 전기적 활동에 심한 비대칭(이는 수줍음, 외로움, 낮은 사회성, 불행함의 정도를 나타낸다) 현상이 나타났다. 

이 연구결과는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타고난 DNA라기보다는 우리가 아기였을 때 우리를 보살펴준 사람의 태도임을 시사한다. 삶에 대한 두려움, 호기심, 새로운 경험에 대한 태도, 예민함 등은 우리의 DNA에 처음부터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유전자도 바뀔 수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신경과학자들은 만약 귀에서 청각피질에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결국 사용되지 않는 청각피질은 소멸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신경학자 헨리 네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뇌의 특정 영역과 기능이 유전인자에 의해 고정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선천적 청각장애인들을 연구한 결과 그들이 정상인보다 동작을 더 잘 감지하고 주변부 시각이 뛰어났던 것이다. 이는 청각장애인들이 자신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청각피질을 다른 기능, 즉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쪽으로 발달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각피질이나 청각피질처럼 고정된 이름으로 불리는 뇌의 영역들조차도 DNA가 의도하는 방향대로 가지 않았다. 뇌의 영역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위스콘신대학의 폴 바치리타 박사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감각을 감지하는 모든 영역이 동일하게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 완전히 대체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이 눈을 통해 볼 수 없다면 혀를 통해 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마침내 안경 속에 감춘 카메라와 연결된 컴퓨터를 통해 혀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소형장치가 개발되었다. 이 장치를 이용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시각장애 소녀가 지휘자의 동작을 혀로 감지하면서 합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우리의 감각기관이 필요에 따라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무엇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누르는가
유전자 결정론에서는 특정 유전자에 의해 인간의 행동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의 뇌과학은 인간이 고정된 뇌 회로 속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생쥐 실험을 했던 미니 교수는 유전학적인 면에서 침착한 쥐와 예민한 쥐의 유전자는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염기서열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염기서열은 자연의 절대적인 명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제안에 가까운 것이어서 상황에 따라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유전자는 침묵할 수도 있고, 매우 활동적이 될 수도 있다. 유전자의 활동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환경이다”라고 말했다. 즉 애정이 풍부한 어미가 자주 핥아주면 새끼 쥐의 뇌에서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코르티솔 유전자가 깨어난다.

반면 자주 핥아주지 않는 냉정한 어미한테서는 그 유전자가 침묵하고 만다. 특정 염기서열이 침묵하거나 증폭하는 것은 타고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꾸려나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자주 우울해하고, 다양한 정신적 장애를 일으키는 것은 특정 유전자를 물려받아서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와 환경이 하필 그 유전자가 발현되도록 하는 ‘그 스위치’를 정확하게 눌렀기 때문이다.  


최근 뇌과학이 관심을 갖는 뇌의 가소성 개념은 유전자가 행동을 제어한다는 결정론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이론으로 부각되고 있다. 유전자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대체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타고난 유전자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 생활태도가 뇌에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니 내 유전자를 탓하기 전에 그 유전자의 스위치를 켠 나 자신을 들여다볼 일이다. 더불어 지금 내가 선택하는 것이 어떤 상황을 부를지 내다볼 일이다.

유전자 바꾸기 프로젝트
유전자가 환경과 조건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스스로 긍정의 유전자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자신의 생각 자체를 달리 바라보도록 의식적으로 훈련하면 그 생각을 일으키는 뇌 회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유전자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세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1 꾸준한 정보자극이 유전자를 변화시킨다
유전자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중에도 이미 많은 부분이 형성되어버린 성인의 뇌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사(NASA, 미항공우주국)의 실험은 성인 뇌도 충분히 새로운 신경회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사는 우주인들이 무중력 상태에서 오래 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했다. 그중의 하나가 실험대상자들에게 모든 상이 180도 뒤집혀 보이는 특수안경을 쓰고 생활하게 한 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스트레스 반응을 보였지만 놀랍게도 27일이 지난 후부터는 눈에 비친 상이 원래대로 보이는 현상을 경험했다. 이 실험은 성인 뇌도 지속적으로 정보를 입력하면 새로운 신경회로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성인 뇌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꾸준히 정보자극을 주어야 뇌에서 새로운 신경회로를 만들어낸다. 

2 강한 자극이 유전자를 변화시킨다
하버드대학의 알바로 파스쿠알-레오네 박사는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 뇌의 시각피질이 촉각을 처리하도록 재형성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14세 이후에 시력을 잃은 환자들에게서는 그런 현상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관찰해보니 후천적인 시각장애인들은 대체로 완전히 시력을 잃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희미한 빛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을 갖고 있었다. 즉 어느 정도 시력을 갖고 있으면 시각피질이 완전히 다른 기능으로 대체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갑자기 시력을 상실한 성인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험을 했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들의 시각을 완전히 차단한 후 일주일 동안 촉각과 소리에만 의지해 생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피실험자들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fMRI 검사결과 이들의 시각피질은 시각정보 대신 촉각정보와 청각정보를 처리하고 있었다. 20년 이상 오로지 시각정보만을 처리하던 시각피질이 단 5일 동안의 강제된 휴면상태를 겪은 후 새로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스쿠알-레오네는 나이에 상관없이 시각이나 청각 등의 주요 감각을 상실하게 되면 뇌는 가소성을 발휘해 다른 감각정보를 이용해 스스로 뇌를 재구성한다고 말한다.


이 실험결과는 유전자에 변화를 일으키는 한 가지 힌트를 제공한다. 시각피질 유전자가 완전한 변화를 겪으려면 어느 정도 보이는 희미한 시력이 아니라 완전한 시각 차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즉 뇌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극한의 환경, 절실함, 철저한 집중 등의 요건이 갖춰진다면 우리 뇌는 단 5일 만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3 명상이 유전자를 변화시킨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이 유전자 발현상태를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위스콘신대학의 리처드 데이비슨 박사는 “뇌 회로를 바꿀 수 있는 의지는 마음의 특별한 상태나 주의집중 능력 같은 정교한 차원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 힘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을 하면 뇌에서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세로토닌은 뇌간에서 발생해 뇌 전체의 기능을 조율하는 신경물질로 자율신경 조절에 관여한다.

우리의 감정은 자율신경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생각대로 감정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그 자율신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명상이다.

글·전채연 ccyy74@naver.com  | 일러스트레이션·이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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