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냄새와 함께 남는다

기억은 냄새와 함께 남는다

후각의 특성과 이를 활용한 질병 진단과 치료

브레인 108호
2024년 12월 27일 (금)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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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은 냄새와 함께 남는다 (사진_게티이미지 코리아)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음식의 향미

“오늘 급식메뉴는 뭔가요?”

최근 큰 화제가 된 넷플릭스 콘텐츠 ‘흑백요리사:요리 계급 전쟁’에서 심사위원 안성재 셰프가 참가자 ‘급식대가(본명 이미영)’의 음식을 심사하기 전 했던 말이다.

15년 경력의 초등학교 급식조리사였던 이미영 씨는 100명이 참가한 요리경연대회에 급식메뉴를 가지고 참가해 화제가 되었다. 국내 유일의 미슐랭 3스타를 받은 안성재 셰프는 급식판에 담긴 밥과 국, 반찬을 보며 미국으로 이민 하기 전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 누구보다 맛에 대해 까다로운 심사를 했던 안 셰프는 방송 후에도 한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요리로 ‘급식대가’의 음식을 꼽았다. 

이처럼 음식의 맛과 향은 그와 관련된 과거의 기억을 순식간에 소환한다. 음식 속 화학물질은 혀와 코를 통해 뇌로 전달되는데, 특히 향미는 다른 감각들이 뇌에서 처리되는 과정과 달라서 본능이 크게 작용한다.
 

▲ 안성재 셰프와 '급식대가' 이미영 씨 (사진_넷플릭스 제공)

냄새는 일화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신호탄이다

우선 냄새와 향기의 차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향기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꽃, 향, 향수 따위에서 나는 좋은 냄새’라 나온다. 즉 향기는 냄새의 부분집합이라 할 수 있다. 냄새는 후각을 자극해 코의 점막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흔히 향기는 좋은 의미로 쓰이고, 냄새는 좋거나 나쁜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향이 좋다’거나 ‘좋은 냄새가 난다’라는 말과 ‘냄새가 난다’는 전혀 다른 뜻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계층 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냄새로 표현했다. 자수성가한 벤처 회사 대표인 동익(이선균)은 운전기사인 기택(송강호)에게서 ‘아주 오래된 무말랭이 냄새’와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정작 기택과 그의 가족은 그 냄새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동익의 아들 다솜(정현준)은 미술 선생님 기정(박소담)과 기택에게서 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동익의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라는 말에 기택의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한다. 
 

▲ 영화 《기생충》 갈무리


우리 뇌에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 중 시각과 청각으로 들어오는 양에 비하면 후각과 미각은 미미하다. 그렇지만 냄새는 우리 뇌 속에 단단히 기억되어 오랫동안 지속된다. 독특하게도 후각으로 들어온 정보는 추억을 재경험하게 만든다. 마치 그 장소에 다시 간 듯한 느낌, 그때의 일을 머릿속에서 다시 경험하는 느낌이 드는데 이러한 기억을 ‘일화기억’이라 한다.

기억은 의미기억(사실 혹은 지식에 관한 기억)과 일화기억으로 구분하는데, 일화기억은 해마와 편도체에 저장되어 아주 오랫동안 보존된다. 첫 키스, 수능 시험, 결혼식, 출산, 장례 등 강렬한 감정과 함께 경험한 사건들은 일화기억으로 남는다. 냄새는 일화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유발 인자이자 신호탄이다. 일화기억이 냄새를 통해 촉발될 경우, 그때의 상황을 재경험하는 듯한 생생함이 더욱 강렬해진다. 

2001년 미국 모넬 화학감각연구센터의 레이첼 헤르츠 박사 연구팀은 사람들에게 사진과 특정 향을 함께 제시한 다음, 이후 향만 맡게 했을 때 사진을 본 순간의 느낌을 훨씬 더 잘 기억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냄새에 관한 일화기억이 해마와 편도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해마와 편도체는 뇌에서 기억을 처리하는 부위이다. 냄새나 맛은 다른 감각과 달리 감정과 기억을 관장하는 뇌 부위에 직접 영향을 미쳐, 과거의 특정 순간을 자동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이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거나 특정한 냄새를 맡을 때 그와 관련된 과거의 경험이나 감정이 강하게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냄새를 맡더라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른 이유

숨을 쉬면 주변에 있던 냄새 분자들이 우리 몸으로 들어온다. 코로 들어오기도 하고, 입을 통해 들어온 뒤 목구멍 뒤쪽을 거쳐 코 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냄새 분자들이 코에 도달하면 콧구멍 위쪽에 있는 수백만 개의 후각세포가 냄새 분자들과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이를 코의 점막을 통해 감각 세포로 전달한다. 

포유류에는 약 1천 개 이상의 서로 다른 후각 수용체가 있으며, 이들은 유전자에 따로 새롭게 형성된다. 반면 시각 수용체는 네 개에 불과하다. 세 개는 색깔을 인식하고 나머지 한 개는 흑백을 인식한다. 이처럼 신체 감각과 감각 기관을 통틀어 후각처럼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조직은 없다. 이는 후각이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기능인지를 보여준다. 

수많은 후각 수용체는 기본적으로 각기 다른 형태로 인지한다. 같은 냄새를 맡아도 내가 받아들이는 후각 반응과 옆 사람이 받아들이는 반응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두 사람의 후각 수용체를 비교하면 평균적으로 3분의 1 정도가 다르며,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자들도 각각 다르다. 어떤 냄새 분자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면서 어떤 분자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람마다 냄새에 반응하는 정도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후각은 개별적이며, 각자의 방식대로 냄새를 받아들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후각세포는 30~60일마다 새롭게 형성된다고 한다. 후각세포에서 나온 신경 섬유는 후각뇌(후각 망울)까지 이어진다. 이 후각뇌는 눈 뒤쪽, 뇌 아래쪽에 위치하며, 뇌의 다른 부위에 비해 매우 작다. 

그런데 모든 냄새가 냄새로 인지되지는 않는다. 타는 냄새, 페퍼민트, 고추냉이 같이 맵거나 톡 쏘는 강한 자극을 주는 냄새는 삼차 신경(trigeminal nerve)이라는 또 다른 뇌신경을 자극해 입, 코, 눈 부위까지 연결된다. 이 신경 섬유는 자극을 계속 받으면 건강을 위협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기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후각만큼은 반응이 다르다. 냄새를 오래 맡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고, 어느 순간 완전히 맡지 못하게 된다. 

미각은 단맛, 신맛, 쓴맛, 짠맛, 감칠맛 등 다섯 가지로 구분되는데, 우리가 맛을 더 명확하게 표현하려면 후각이 필요하다. 코감기에 걸려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또 후각 신경세포가 손상되거나 뇌에 문제가 생기면 후각 기능이 떨어질 수 있다. 코로나 19에 감염된 환자가 후각과 미각에 이상을 보이는 증세도 후각세포에 바이러스가 침입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 사진_게티이미지 코리아


우리 삶에 깊이 파고든 향기의 힘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주인공이 어느 겨울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입 베어 문 순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홍차와 마들렌만 다를 뿐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다. 이와 같이 맛과 냄새에 의해 불현듯 특정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이 효과는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향수 냄새에 예전에 만나던 사람을 떠올리거나, 어린 시절에 먹었던 음식 맛이 한순간에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프루스트 효과’는 여러 분야에서 활용된다. 향기 관련 마케팅이 대표적이다. 향기는 소비자의 감각을 자극해 감정을 유발함으로써 제품평가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핸드메이드 코스메틱 브랜드 ‘러쉬’ 매장을 지나면 러쉬만의 시그니처 향이 강하게 퍼진다. 러쉬 매장이 있는 곳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곳까지 이 향으로 가득하다. 러쉬는 광고를 하지 않는 대신 특유의 향으로 고객들에게 기업을 알리는 향기 마케팅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교보문고’가 향기 마케팅 성공 사례에 속한다. 교보문고에 들어서면 특유의 향을 맡을 수 있다. 교보문고는 2015년에 시트러스, 피톤치드, 천연 소나무 오일 등을 조합하여 책방 특유의 종이 냄새, 잉크 향, 묵향, 고서 향이 느껴지는 ‘책 향(The Scent of Page)’을 개발했다. 교보문고 매장에서의 경험을 고객들이 오래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향기 마케팅은 정서적이고 경험적인 마케팅이다. 향기로 경쟁 업체와 차별화를 시도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해 고객들을 사로잡는다. 이는 강력한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켜 고객 만족도, 충성도 및 매출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후각의 특성을 이용한 질병 진단과 치료

향기는 우울증이나 치매 치료 등 의학 분야에서도 활용된다. 편안함, 행복감 등 잊고 있던 긍정적 감정과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향기를 맡음으로써 우울증 환자의 증상을 완화하고, 후각 기능 검사를 통해 치매를 조기 선별하는 식이다. 

후각 기능 상실이 퇴행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과 연관된다는 연구 결과도 이어지고 있다. 시카고 대학교 연구팀은 2017년 미국 노인의학회지에 발표한 장기 연구에서 일반적인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앞으로 5년 내 치매를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발표했다. 

알츠하이머 치매에 걸리면 후각신경부터 이상이 발생하고, 기억과 학습 등에 영향을 미치는 해마, 감정에 영향을 주는 편도체, 대뇌로 손상이 이어지면서 병세가 심해진다. 이처럼 치매로 손상되는 기관이 냄새를 인지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기관과 유사하다는 점 때문에 후각을 활성화하면 치매를 예방하고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팀은 노인들의 침실에 6개월 동안 매일 밤 2시간씩 향기가 퍼지게 했는데, 대조군에 비해 인지 능력이 향상됐다는 연구 결과를 2023년 《Frontiers in Neuroscience》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60~85세의 남녀 참가자 43명에게 각각 다른 천연 오일과 디퓨저를 제공했다. 참가자들은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각기 다른 카트리지를 디퓨저에 넣었고, 방향제는 잠을 자는 중 2시간 동안 뿌려졌다. 6개월 후, 기억력 평가에서 참가자들은 대조군에 비해 인지 능력이 226퍼센트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fMRI 영상 검사에서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전전두엽 피질과 내측 측두엽을 연결하는 경로가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냄새에 관한 연구는 다른 감각에 비해 최근에서야 시작됐다. 후각은 사람마다 개별적이기에 연구가 어려웠던 탓이다. 1991년 린다 벅Linda Buck과 리처드 액설Richard Axel이 후각 수용체 유전자를 발견했고, 이들은 20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후각에 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관련 지식이 축적되고 있다. 

후각이 기억, 감정, 정서와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앞으로 후각의 특성을 이용해 신경과학, 정신건강 및 질병 진단, 감정 조절과 같은 심리 치료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_전은애 수석기자 hspmak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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