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바위, 보”
“내가 이겼다.”
“아냐, 우리 반은 지는 게 이기는 거니까 내가 이겼어. 그렇지?”
우리반 아이들이 다른 반과 축구시합을 하는데 그 곁을 지나치다가 자기들끼리 주고 받는 이 말에 혼자 속으로 빙그레 웃어본다. 우리반의 가위바위보는 좀 특별하다. 가위를 내면 보를 낸 사람이 이기는, 지는 사람이 이기는 가위바위보다. 학기 초에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면서 그렇게 정했는데 처음에는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하더니만 이제는 당연하게 져야 이기는 줄 안다.
아이들하고 지내다보면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게 필요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빨리 순서를 정하거나 가려 뽑기를 할 때, 여럿 중에 한 사람을 뽑아야 하지만 딱히 기준을 정할 수 없을 때, 또 선생님 마음대로 정하면 아이들의 원망을 받게 될 때 쉽게 가위바위보를 해서 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가위바위보를 할 때 이긴 사람이 뽑히거나 혜택을 보는 게 당연했다. 한 번도 왜 그러지라고 생각조차 안 해본, 그냥 그렇게 늘 그래왔던 거라 나도 큰 고민 없이 무언가 정하기 어려울 때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에게 기회를 주곤 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뇌교육 재량시간에 아이들과 고정관념 깨기 게임으로 지는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먼저 가위든 바위든 낸다. 그러면 아이들은 내 손 모양을 보자마자 자신이 지도록 보나 가위를 내야한다. 그런데 해보니 이게 참 쉽지가 않다. 우리 뇌는 한 번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습관이나 생각대로 무의식중에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을 해보면 의지와 다르게 손이 먼저 나가는 불일치를 경험하게 되고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고정된 생각의 틀에 갇혀있는지 깨닫게 된다.
사실 가위바위보에는 오묘한 이치가 들어있다. 가위는 보를, 보는 바위를, 또 바위는 가위를 이기니까 결국 셋을 놓고 보면 이기고 지는 것이 없는 돌고 도는 관계가 된다. 이걸 알게 되었을 때 가위바위보에 세상의 이치가 담겨있구나 하고 감탄을 한 적이 있다. 거기에 덧붙여 뇌교육을 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재미있는 게임으로 사용해보니까 가위바위보에 더 깊은 의미를 덧붙이게 되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 이건 단순한 일이지만 짜릿한 일이기도 하다. 가위바위보를 못해서 늘 손해를 보았다는 아이들은 이 가위바위보를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반 가위바위보 규칙을 이렇게 정한 진짜 이유는 지는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아이들이 무의식중에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사실은 우리 생각 속에 있는 거고, 지는 사람도 이기는 사람도 없다는 걸 저절로 알 게 될 거라 믿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꾸어 주는 것, 사실은 어렵지만 내가 갖고 있는 틀을 깨닫는 순간 훨씬 쉬워진다.
반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를 하는 걸 지켜보면 참 재미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란 걸 이제는 뻔히 알면서도 아이들은 막상 가위바위보를 할 때는 저절로 이기는 손을 내고 만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이겨버리고는 “아, 나 좀 봐. 또 이겨버렸어.”하고 자신의 실수를 한탄한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저절로 픽, 하고 웃음이 터진다. 진 사람이 오히려 신나서 “졌다!”하고 외치는 모습에 괜히 덩달아 나도 통쾌해지는 것이다.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없는 가위바위보, 그래서 우리반 아이들은 진 사람이 이기는 규칙을 다른 반까지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닌다. 으이구, 귀여운 녀석들.
글. 김진희
올해로 교직경력 18년차 교사입니다. 고3시절 장래희망에 교사라고 쓰기 싫어 '존경받는 교사'라고 굳이 적어넣었던 것이 얼마나 거대한 일이었는지를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