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은 무한했으나 '무한'의 의미는 몰랐던 남자

브레인 히스토리 ③

브레인 94호
2022년 08월 17일 (수)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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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거나 들은 것을 그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기준으로  핵심 요소를 추려내 머릿속에 저장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대로 인출되지도 않는다. 현재의 신체와 정서 상태에 따라 기억을 재창조하거나 재구성해서 인출한다.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그 경험 후에 획득한 감정과 신념, 또는 지식까지 추가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사건 이후 획득한 정서나 지식에 따라 다르게 저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만약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러시아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출처_Matematiksel.webp


“고스란히 기억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1920년대 중반, 러시아의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Alexander Romanovich Luria의 연구실로 한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신문사에서 기자로 근무하고 있는데, 자신의 상사인 편집국장이 기억력 테스트를 해보라고 하여 찾아왔다고 했다. 편집국장은 회의 때 아무런 필기도구도 지참하지 않고 참석해 가만히 앉아있는 그에게 왜 딴청을 피우느냐고 질책했는데, 그는 국장에게 자신이 이제껏 들은 지시 사항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워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아니, 남이 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십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지 않나요?”라며 반문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솔로몬 셰르솁스키Solomon V. Shereshevskii. 이후 그의 두뇌는 30여 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연구 대상이 되었다. 셰르솁스키는 복잡한 수학 공식이나 규칙 없이 나열된 숫자, 심지어 외국어로 된 시를 외우는 다양한 실험에서 불과 몇 분 만에 과제를 완수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지능검사 결과 그의 지능은 천재라기보다 오히려 평균 수준이었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

셰르솁스키는 기억의 ‘용량’은 물론, 기억의 ‘지속성’에도 한계가 없었다. 여러 실험을 통해 그에게 아무리 많은 단어나 숫자를 제시해도 거뜬히 재현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한 주, 한 달, 한 해, 심지어 15년이 지난 뒤에도 모두 기억해낼 수 있었다.

셰르솁스키가 기억하기 위해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앞에 제시된 단어나 숫자를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제시된 단어 혹은 숫자를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시켰다.
 

▲ 솔로몬 셰르솁스키. 사진_위키피디아
 

그는 숫자 표를 3분 정도 관찰한 다음,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듯 약간의 뜸을 들였다. 그리고 이 숫자 표의 모든 숫자를 원래 순서대로 부르는 데 걸린 시간은 40초에 불과했다. 두 번째 줄 숫자만 말하는 데는 25초가 걸렸고, 그 줄을 역순으로 재현하는 데에는 30초가 걸렸다. 대각선 방향으로 숫자를 기억해 낼 때는 50초가 걸렸다. 그리고 몇 달 뒤 다시 한번 그날 테스트했던 숫자 표를 재현하게 했을 때의 속도 역시 첫 테스트와 유사했다.
 

▲ 1939년 5월 10일자 실험 숫자표
 

셰르솁스키는 테스트하던 날 당시의 방을 ‘보고’, 연구자의 목소리를 ‘듣고’, 숫자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기억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숫자를 재현할 때 방해 요소가 있으면-연구자가 “맞습니다”라고 피드백을 한다거나 예상하지 못한 소음이 발생하는 등 -그날 숫자표에 ‘얼룩’이 생기거나 ‘수증기’ 혹은 ‘반점’이 생겨 이미지가 흐릿해지면서 기억을 떠올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또 하나 그는 숫자나 소리, 단어 같은 개별적인 구성 요소들은 모두 기억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건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의 얼굴은 너무나도 쉽게 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읽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책 속의 글자는 변화가 너무 많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시각화하기 어려운 추상적 개념은 이해하지 못해

앞서 말했듯 셰르솁스키는 정보를 이미지화해서 기억을 저장했다. 그렇다면 이미지화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철학과 신념, 학교에서 배운 산소, 이산화탄소, 질소 같은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는 없다. 이런 추상적 개념을 처음 접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문제로 더는 골치를 썩이지 않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시절의 구상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데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다른 차원으로의 전이를 이루고 나면, 추상적인 개념은 과거에 잠시 겪었던 어려움일 뿐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안타깝게도 셰르솁스키는 보다 높은 사고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인간 언어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추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는 오로지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는 것들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무(無)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셰르솁스키에게 ‘무’를 이미지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없음’을 이미지화한다면 그건 ‘있음(有)’이 되기 때문이다. 셰르솁스키가 ‘없음’을 이해하려면 없음이 있어야 하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그는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들은 대부분 습득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며 보통의 사람들과 다름없는 삶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높은 차원의 인식 지대로 나아가는 시도는 매번 좌절로 끝이 났다.


저장된 기억을 망각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력을 높일 방법을 찾지만, 상대적으로 뭔가를 잊어버리기 위한 노력은 굳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셰르솁스키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어떻게 하면 망각하냐는 것이었다.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알게 된 이후 셰르솁스키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전문 기억술사로 나섰지만, 공연을 하면 할수록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매일 비슷한 공연을 하다 보니 어제 공연에서 관객이 임의로 불러준 숫자가 오늘 공연에서 떠올라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와 문자표, 그에 따른 장소, 소리, 냄새 등이 저장되어 있어 시간이 갈수록 정보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셰르솁스키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내용을 종이에 적어 그 종이를 불태워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점점 쌓이며 엉켜가는 기억에 자포자기하고 있던 무렵, 그는 마침내 망각하는 법을 스스로 발견했다.

“4월 23일이었죠. 저는 연달아 세 번의 공연으로 지친 상태에서 과연 네 번째 공연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눈앞에 방금 전에 했던 세 번의 공연에서 사용한 숫자들의 도표가 떠올랐습니다. 정말 끔찍했죠. 그런데 문득 ‘이제부터는 그 숫자 도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미지든 내가 원하지 않으면 정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저는 자유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그에게 다소 늦게 온 듯했다. 셰르솁스키는 현실과 상상을 혼동케 하는 강력한 기억들로 5분 전에 들은 이야기와 5년 전에 들은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상태가 악화되어 말년에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셰르솁스키의 사례는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기억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과 망각도 매우 중요한 뇌의 기능이라는 것. 그의 특별한 능력은 인간의 뇌를 이해하는 데 크게 공헌했지만, 동시에 그의 인생에서는 장애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삶의 아이러니를 절감한다.


글. 전은애 수석기자 hspmaker@gmail.com
참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알렉산드르 로마노비치 루리야,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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