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천재라는 명사에 아주 친근한 20세기 위대한 과학자이다. 그의 얼굴은 이미 천재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가 발표한 몇 개의 논문들은 모두 19세기 물리학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미해결인 채로 남겨져 있던 문제들을 풀어낸 것으로 물리학의 새로운 길을 열었던 놀라운 업적이었다.
그는 브라운운동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분자와 분자의 열운동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빛이 입자라는 생각을 서술한 논문으로 양자학의 길을 열기도 했다. 또한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뉴턴 이후 사람들의 인식 안에 확고하게 자리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밑바닥부터 뒤집음으로써 이전부터 물리학자들을 괴롭혀오던 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바꾼 것으로 코페르니쿠스 이후 경험해보지 못한 인식의 대전환이었다.
두정엽이 넓은 그의 뇌 구조
이처럼 인식의 일대전환을 가져왔던 그의 머리는 도대체 얼마나 좋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의 뇌는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아인슈타인 사후, 그의 뇌에 대한 활발한 연구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의 뇌 무게는 보통사람과 큰 차이가 없고, 다만 뇌의 두정엽(마루엽)이 보통사람보다 15% 정도 더 넓다고 한다.
사람의 뇌를 보면 전두엽과 측두엽을 가르면서 뻗어있는 실비우스구라는 경계가 있고, 두정엽 앞쪽에서 위 아래로 뻗어있는 후중심선이 있다. 보통 사람들의 뇌는 이 실비우스구와 후중심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되어있는 반면 아인슈타인의 뇌는 이 실비우스구와 후중심선이 그대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두정엽 아래가 많이 넓어져 있다고 한다.
이 부위는 인간의 기하학적 공간 구성 및 계산능력을 담당하는 곳으로 그의 뇌를 연구한 뇌과학자들은 그의 수학적 능력이 이러한 뇌의 구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뇌의 크기나 모양이 그 사람의 재능과 반드시 연관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이보다는 효과적인 뇌신경의 연결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뉴런의 욕망, 네트워킹
사람의 뇌 속엔 수조 개의 뇌 세포가 있다. 뉴런이라 불리는 각각의 뇌 세포는 다른 뉴런들과의 연결을 통해 역할을 수행해 나간다. 잘 발달된 뉴런일수록 건강한 가지들(시냅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자극에 대해 적절한 네트워크를 이용해 효과적으로 과제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뉴런의 기본적인 욕망은 ‘네트워킹 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뉴런들이 네트워킹 하는 데는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 자극이 필요할 것이고, 알맞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야 하고, 풍부한 시냅스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때에 효과적인 자극들이 적절하게 또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진다면 좀 더 많고 다양한 네트워크들이 생겨날 것이다.
이렇게 한번 연결되었던 뉴런들은 특정한 상황이 주어질 때 이전보다 빠르게 네트워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쯤에서 아인슈타인의 뇌를 상상해본다. 아마 물리학이나 수학 분야를 담당하는 뉴런들의 연결 조합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물리학과 수학 분야에서 뛰어났을 거라고 말하긴 어렵다.
누구보다도 집중해서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하곤 했던 그에게는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뉴런의 조합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겨나기 시작한 새로운 뉴런의 네트워크는 아인슈타인이 문제에 골몰하면 할수록 그 연결이 점점 더 치밀해지고 그 방식 또한 익숙해진다.
이와 비슷한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던 어느 날, 독특한 방식의 조합이, 마치 뭔가 격렬하게 폭발하듯이 일어난다. 이 조합은 너무나 강렬해서 마치 몇 만 볼트의 빛이 번쩍하고 빛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게 바로 깨달음의 순간, 아인슈타인이 고민해온 빛과 시간의 문제 등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위대한 영감의 순간에 다다르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 그는 오랜 시간을 자신이 집중했던 문제에 쏟아 부었으며, 세속적인 삶이 주는 시련을 견디기도 했고, 끊임없이 생각 속에서 실험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어떤 직관 같은 것으로 그러한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 수 있었지만 그러한 직관마저도 실은 의식적인 노력에서 피어난 나무였다.
별다른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학생
“나는 정말이지 아인슈타인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그가 졸업한 스위스 폴리테크닉의 뛰어난 스승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았던 수학자 민코프스키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논문을 읽고 처음 내뱉은 말이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모차르트 같은 여타의 신동처럼 화려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도 않았고, 대학시절에도 크게 뒤쳐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뛰어나지도 않은 학생이었다.
1879년 독일 울름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말 배우는 것이 늦어 주위사람들을 걱정시키기도 했다. 일곱 살 때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문제를 푸는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그저 그런 수준의 아이로 여겨졌다. 이후 열 살 때 입학했던 김나지움에서는 그런 평가가 더욱 심각해졌는데 김나지움은 기계적 암기가 지배하는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적을 올리는 데는 뛰어난 기억력이 필수였고, 아인슈타인에게는 그게 문제였다. 그래서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에는 아인슈타인에게 비참한 일들이 많았다. 한 교사는 아인슈타인의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절대 어떤 일도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란 말도 서슴지 않았는가 하면 아인슈타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교사가 학급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존경에 흠이 간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에게서 권위에 대한 단순한 저항 이상의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당시 교사들의 반응은 가혹한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반응은 겉모습을 넘어선 세계로 물러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겉모습을 넘어선 세계를 느끼다
아인슈타인이 그런 세계와 처음 관련을 맺은 것은 네 살 무렵부터였다. 아인슈타인이 아파서 누워있자 아버지가 갖고 놀라며 나침반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어떻게 돌려도 고집스럽게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을 보며 “사물들 뒤에는 뭔가 깊이 감추어진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그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보이는 것만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가진 음악적 재능은 그의 천재성을 조금은 보여주는 요소였는데 아마도 그런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에 잘 맞았기 때문이 아닐까. 5세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바이올린을 13세쯤부터 혼자 갈고 닦은 그에게 음악은 이후로도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직관을 강조하는 아라우 주립학교의 소중한 경험
김나지움을 중퇴한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이후 그만의 개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직관을 강조했던 이 학교는 직관이야말로 만물의 형태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진실한 수단이라는 믿음을 갖고 교육했는데 이에 따라 지식을 강제로 주입하지 않았고 독립적 사고를 강조했다.
과학자로 발전해가는 데는 암기나 주입식 학습보다는 아라우에서 강조하던 시각적 이해, 즉 직관의 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런 방식의 사고에 물리학 지식을 결합하여 ‘시각적 사고 실험’에 들어갔으며, 이 실험은 그의 정신 안에서 10년 동안의 숙성 기간을 거친다. 그것은 사람이 광파 위의 한 점을 추적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으로 후일 특수상대성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생계를 위협받는 시련이 시작되고
아라우를 졸업하고 1896년 폴리테크닉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기에는 핵심적이지도 않은 자료를 대량으로 암기해야 하는 일에 좌절감을 느꼈고 시각적 사고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독학 방식으로 돌아가 혼자서 이론 물리학을 공부했다. 교수들과 그닥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그는 학교의 조교로 남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자존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사랑하는 여인 밀레바와 결혼을 약속했던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보낸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그들은 하루 벌어 하루 생활하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 속에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숙성시켜 나갔던 그는 다행스럽게도 1902년 스위스 특허국에 취직하게 된다. 이것은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좀 더 자유롭게 좀 더 집중해서 그의 사고 실험을 해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이었다.
가장 창조적인 시간, 특허국 시절
그는 특허국 시절, 그의 삶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는 그의 생각을 성숙시켜 나갈 시간과 기본적인 생계, 그리고 지적 자극들이 있었다. 특히 올림피아 아카데미라 명명한 그의 친구들과의 그룹에서 당시 최신 이론들을 토론하고 분석하기도 했고 시간과 같은 개념의 기원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에 사고실험의 시각적 이미지를 이용하면서 감각지각의 세계, 혹은 직관을 뛰어넘는 세계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창조적 세계로 다가가기까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작업은 실은 1895년의 사고실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1905년에 가서야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만 그 10년 동안 그는 이론물리학의 기존 방법들에 능숙한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여기에 특허국 시절 가졌던 과제에 대한 엄청난 집중, 올림피아 아카데미에서의 깊이 있는 토론과 독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한 욕망은 그를 점점 직관과 그 너머의 세계로 이끌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은 점점 의식적 사고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의식은 점점 특정한 접근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창조성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적당한 이미지나 비유의 발견을 통해 이미 손에 쥐고 있는 사실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기 시작했다. 이러한 깨달음은 창조성의 가이드라인을 주었고 그래서 이때는 생각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져 거의 폭발의 수준이 되었다. 그 폭발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인식의 전환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글│지은주 asaac@powerbr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