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침탈 이전에 일본의 신들이 건너왔다!

조선의 침탈 이전에 일본의 신들이 건너왔다!

단군문화기획 71편 부산 초량왜관과 용두산의 역사를 찾아서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는 중구에 몰려 있다. 남포동 부산국제영화제 BIFF거리, 영화로 유명해진 국제시장, 용두산 공원과 부산타워 등이다. 시장에서 부산 어묵을 먹고 영화도 보면서 쇼핑하며 지내는 관광객의 발걸음이 바쁘다. 번잡한 부산의 거리를 보면서 이곳의 과거는 어땠을까? 

▲ 용두산 신사의 전경(사진=부산중구청)

무역의 중심지에서 침략의 교두보로
 
역사를 살펴보니 부산은 조일무역의 중심지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끈질긴 요구와 노략질을 일삼은 왜구를 회유하려는 조선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범일동에 첫 왜관(倭館)이 설치된다. 이어 절영동 왜관(영도)과 두포동 왜관(수정동)을 거쳐 초량왜관에 이른다. 이때 200년 가까이 호황을 누린다. 
 
초량왜관은 1678년 용두산을 포함해서 10만평 규모로 건설됐고 상주인구는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동북아 최대의 무역중계지라고도 칭송하지만, 왜관은 단순히 장사하는 곳이 아니었다. 일본의 신(神)도 조선으로 건너왔던 것이다.
 
주경업 부산민학회장의 연구에 따르면 초량왜관에는 일찍부터 여러 종류의 신사가 존재했다고 밝혔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재물의 신인 변재천을 모신 변재신(辯才神), 상업의 신을 모신 도하신사(滔荷神社), 비를 오게 하고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 금도비라신사(金刀比羅神社)가 있었다. 이후 1819년 3월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이었던 가등청청(加藤清正)을 용미산에 모셔진 옥수신사(玉垂神社)에 합사시킨다.
 
메이지 정부가 군사력을 앞세워 초량왜관을 접수한 때가 1873년이라고 하니, 그보다 ‘가등청정’이라는 일본의 신이 먼저 와서 후손들을 기다리고 있던 셈이다. 당시는 일본의 침략을 받기 이전인데, 어떻게 가등청정이라는 조선침략의 원흉을 감히 모실 수가 있었을까? 지금으로 말하면 일본의 전범을 모신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와 같은 것이 한국에 있다는 말이 된다. 그만큼 조선은 왜관에서 일본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관심이 없었다. 당시 중화주의가 조선 지식인들의 사고를 묶어놓았던 시대적인 배경도 있었다.
 
조선중화주의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 중화문명의 정통성이 조선으로 계승되었다는 이념을 말한다. 이에 대해 계승범 서강대 교수는 “조선 역사의 시계는 삼전도의 항복(병자호란)에 이어 명의 멸망이 있었던 1644년에 발이 묶여 더 이상은 힘차게 나아가지 못했다”라며 “조선중화주의가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가져와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라고 비판했다. 
 
반면 일본의 입장에서 초량왜관은 조선의 정보를 입수하는 최고의 요충지였다. 1716년 대마도주가 왜관을 통해 기록했다는 ‘조선탐사’에는 동래에서 서울까지 990리이고 연락은 평상시엔 13일이 걸리고 급할 때는 5일, 파발은 2일 반 걸린다“라고 했다. 조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속적으로 염탐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조일전쟁(1592∼159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패배한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차곡차곡 쌓았던 셈이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됐다. 초량왜관은 무역의 중심지에서 일본의 대륙침탈을 위한 교두보로 바뀌게 된다. 1899년 5월 용두산에 신사를 새롭게 마련하여 신사의 천궁식을 거행한다. 신사의 명칭은 용두산신사로 명명한다. 이때를 전후해서 신사는 침략의 신들이 중심으로 이룬다. 예부터 무도, 무운의 신으로 모신 팔번대신(八幡大神, 1880),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을 점령했다는 신공황후(神功皇后, 1899)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풍국대신(豊國大神, 1899) 등이다.
 
주 회장은 “제신들은 모두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밀접한 인물들”이라며 “청일전쟁(1894)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자신들의 본격적인 진출로서 구체화되고 또 이러한 바람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관련이 있다”라고 말했다.
 
용두산의 비애
 
1915년 조선총독부는 신사의 건립을 장려하고 참배를 강제한다. 이들은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는 데 앞장선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에는 황실의 조상이나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신 신사(神社)가 36개소, 보편적인 신을 모신 신사(神祠)가 41개소였다. 조선신궁이 남산에 설립된 1925년에는 신사(神社)가 42개, 신사(神祠)는 108개로 늘어난다.
 
용두산신사는 상중하 3단으로 재정비하여 신사를 3단 중 가장 높은 곳에 모신다. 1936년 8월에는 경성신사와 함께 국폐사(國弊社)로 격상된다. 국폐사란 조선총독부가 관리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를 말한다.
 
당시 조선인들은 전차를 타고 가다가 용두산 신사를 지날 때, 일어서 신사를 향해 절을 해야 했다.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용두산 신사에 참배한 일화를 전했다.
 
“부민동에 있는 부민초등학교에서 용두산까지 제법 먼 길을 6학년 꼬마들은 단체로 걸어서 왔다. 십리는 더 되게 걸은 끝에야 대청동에서 용두산의 산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는 비탈진 숲길을 반의 반 마장 정도 더 걷고서야 겨우 신사에 도착했을 때는 다들 지쳐 있었다. 교사의 지시를 따라서 일본 신에게 허리 굽혀 큰절을 했다. 한목소리로 일본이 전쟁에 이기게 해달라고 빌었다. 조선 아이로서가 아니라, 일본의 국민으로서 그렇게 했다.” 
 
광복 후 전국 136개 처의 일본신사가 불태워졌다. 그러나 부산 용두산신사는 3개월이 지나도록 멀쩡했다. 이를 지켜보던 37살 열혈 청년이 시너를 들고 신사로 향한다. 1945년 11월 17일 신사는 한 줌의 재가 되고 만다. 1960년대는 일본신사가 없는 용두산에 단군전을 건립하려는 운동도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만나본다.
  
■ 참고문헌
 
계승범, ‘정지된 시간-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서강대학교출판부, 2011년
주경업, ‘부산학, 길 위에서 만나다’, 부산민학회, 2011년
주경업, ‘1928 그때 무슨 일이’, 부산중구청, 2013년
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부산일보, 2011년 6월 3일
<1> 동래부의 장려한 낙일(落日), 국제신문 2015년 4월 21일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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