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교회에 헌금한 백산 안희제…독립운동 자금이었나?

초량교회에 헌금한 백산 안희제…독립운동 자금이었나?

단군문화기획 70편 안경하 광복회 부산광역시 지부장 인터뷰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에 관한 일화는 손자 안경하 광복회 부산광역시 지부장이 전했다. 백산은 변장에 능했다. 일본 경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철저히 위장생활을 했다는 것. 때문에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여관에 숙박하실 때나 기차를 이용할 시 일본 옷차림에 금테안경과 단장을 사용, 1등 객실만을 골라 쓰며 일본인 행세를 했다고 합니다.”


▲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의 손자 안경하 광복회 부산광역시 지부장(사진=윤한주 기자)

첩자를 응징하지 않은 이유?
 
백산은 만주에서 발해농장을 세웠을 때도 일부러 동경성 경찰 분서장을 찾아가 가명으로 인사를 했을 정도다. 그러나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과 임오교변으로 목단강 감옥에 수감됐다. 안 지부장에 따르면 일본 경찰의 첩자 조병헌이 백산의 정체를 밀고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장남 상록(아버지) 등 유족에게 ‘그를 용서해주라’고 유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해방 후 설뫼(입산리)의 문중은 사람을 풀어 조병현을 수배한 끝에 그가 합천군 삼가면에서 중풍에 걸려 폐인처럼 지내고 있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유족들은 조의 처리 방법을 놓고 며칠 동안 논란을 벌인 끝에 아버님(상록)의 강력한 주장으로 밀고자에 대해 응징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1943년 9월 2일 백산은 혹독한 가뭄으로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출감 후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몇 시간 만에 순국했다. 백산은 임종을 앞두고 큰아들(상록)에게 유언을 남겼다.
 
“미급한 아비를 두어 너는 고생이 많다. 너는 아비가 일평생 뜻한 바가 무엇인가를 잘 알 터이니 노력하여 동포의 고난을 네 고난으로 알고 살아가거라. 가사(家事)든, 국사(國事)든 오직 자력(自力)을 중심으로 해야 하느니라.”
 
안 지부장은 할아버지가 자리에 누운 채 가슴에 남는 회포가 너무나 많은 듯 이야기를 더 하려다가 그만 운명했다고 전했다. * '백산 안희제의 생애와 민족운동-백산 고택의 숨은 이야기(선인2013)'를 참조한 것임

임시정부기념관 vs 백산기념관
 
현재 백산기념관은 옛 백산상회가 있던 곳이다.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댄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광복 50주년을 기념해서 중구청이 기념관을 지으려고 옛 건물을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안경하 지부장은 할 말이 많았다.
 
“얼마 전에 중국 상해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주변의 건물과 땅값이 많이 올랐어요. 하지만 상해임시정부는 (옛 건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요. (백상상회는) 그 어려운 시절에 독립자금을 보냈고 애국지사가 모이던 곳입니다. 그 건물을 헐어버리고 땅 밑에 지어버리고……. 건물을 철거할 때 유족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었습니다.”
 
안 지부장은 전시관 중에서 백산상회 주주명단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명단에는 경주 최부잣집 최 준(2,000주), 안희제(2,000주), 윤현태(2,000주)를 비롯해서 32명이 있다. 부산은 5명, 경상남도는 20명이다. 경성 남형우(300주), 천안 정재원(100주)도 있다. 부산을 넘어 경상도를 대표하는 기업이었고 전국적인 참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안 지부장은 이들은 모두 애국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할아버지와 몇 분만 언론에서 다뤄주지, 실제로는 전부 애국자들입니다. 돈을 낸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없는 돈을 냈다는 데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논밭을 다 바쳤으니까요. 독립운동사에서 조명을 해줘야 합니다.”
 
안 지부장은 백산이 소장한 단군 영정이나 책은 어릴 적에 많이 봤다고 한다. 그러나 의령의 생가를 복원할 때 불이 나면서 관련 자료가 거의 사라졌다는 것. 나머지는 대종교 총본산(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단지 서기 대신에 단기를 쓴다고 했다.
 
“할아버지 묘소의 기록도 단기입니다. 대종교로 활동한 것도 있지만 우리 건국기원이기 때문이죠.”

▲ 백산 안희제가 초량교회 신축 찬조금을 기부한 자료(사진=윤한주 기자)
 
백산 안희제와 초량교회 

흥미로운 것은 백산이 초량교회 신축 찬조금을 기부한 자료가 최근에 발견된 점이다. 당시 돈 2천 원을 낸 기록이 선명하다. 

1892년 미국인 베어드 선교사가 설립한 초량교회는 기독교계에서 유서가 깊은 곳으로 유명하다. 1930년대 말 도산 안창호 선생이 교회를 방문해서 독립운동을 역설했다. 또 6.25 전쟁 당시 부산 임시 수도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예배를 봤던 곳이다. 

백산기념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어느 신도의 할머니가 “우리 영감이 옛날에 (교회신축) 성금을 냈다”라는 말을 듣고 찾다가 발견하게 됐다. 교회 관계자들도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님이 헌금을 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백산기념관으로 찬조금 자료를 가져다주었다.

백산기념관 관계자는 “이 분이 대종교에 입교한 분이 아닙니까? 정말 종교를 초월하신 것이죠”라고 말했다. 

당시 기부 명세는 백산상회 주주로 참여했던 윤현태(1,000원), 권오봉(500원), 정재완(500원) 등이 있다. 안 씨 문중도 110원을 냈다. 

안경하 지부장은 백산상회처럼 초량교회를 통해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내지 않았느냐고 추정했다. 하지만 이동언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전화통화에서 “백산은 윤현태와 함께 활동했다. 그런데 윤현태는 기독교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라며 “백산의 다양한 활동 중의 하나로 (교회 신축) 성금을 낸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 백산기념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3가 10-2 (바로가기 클릭)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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