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증평까지 1시간 30분이 걸렸다. 터미널 앞에는 증평군청이 있었다. 길게 늘어선 택시 중에 앞차를 잡고 ‘단군전으로 갑시다’고 말했다. 넘어져 코 닿을 거리라고 했던가. 기사는 5분 만에 나를 단군전으로 데려가서 ‘2십 8만원이 나왔습니다’라며 웃었다. 기본요금 2천 8백 원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돌아갈 때는 걸어보니 10분 거리였다.
증평군 향토유적 1호인 단군전은 시내 한가운데 있었다. 대부분 단군전이 산속이나 시 외곽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랐다. 마중 나온 육재동 증평단군봉찬회장을 따라 단군전으로 올랐다.
▲ 증평 단군전 정문 오른쪽에 건립된 단군상(사진=윤한주 기자)
좌우 이념의 대립, ‘단군’을 구심으로
단군전 정문 왼편에 자리한 봉찬회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검은 의자와 책상들이 보였다. 벽면에는 역대 회장들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창설자 김기석(金箕錫,1897∼1978) 선생은 짧은 스포츠머리에 안경을 낀 모습이었다. 굳게 다문 입은 일본 신사를 허물고 단군전을 세운 결의가 느껴졌다.
창설자와 단군전에 관한 역사 자료를 새롭게 구할 수 있을까 기대했다. 아쉽게도 초창기 사진 한 장도 없었다. 단군제례 순서를 담은 문서가 전부였다.
김기석 선생은 단군전을 위해 재산을 털었다. 동지 인사들과 함께 1948년 5월 27일에 단군전을 건립했다. 학자도 아니고 농사를 짓던 마을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이념 갈등을 극복할 대안으로 ‘단군’을 꼽았다.
“구전으로만 들었죠. 당시 우익과 좌익이 있었잖아요. 주민들이 서로 패를 가르고 있었습니다. 단군정신으로 결집해서 (마을의) 평온을 찾자고 한 것이죠. 이렇게 해서 (김기석 선생이) 선구자가 된 겁니다.”
▲ 증평 단군전 창설자 김기석 선생(사진=윤한주 기자)
향토유적 1호
단군전 입구로 오르는 계단은 홍살문[紅─門]이 버티고 있다. 속계(俗界)와 선계(仙界)를 구분함인가? 아무튼 이 문은 능(陵)이나 묘(廟) 앞에 세웠고 나무에 붉은 색을 칠한다. 서울 사직단 단군성전도 같은 문을 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황금색을 입힌 단군상과 김기석선생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단군상은 햇빛을 받아서 그런지 눈이 부셨다.
“민족정신회복운동하는 분이 있어요. 단군선양회 갔더니 기증한다고 해서 구해달라고 했죠. 석축은 이사회에서 십시일반으로 기부해서 만든 겁니다. 원래는 경내 안에 있었는데 보기 싫어서 밖으로 홍보도 할 겸 옮겼습니다.”
단군전으로 들어가려면 홍익문(弘益門)을 열어야 한다. 평소에는 행사를 제외하고 열지 않는다고 한다. 방문하겠다는 사람에 한해서 열어주고 있다. 육 회장도 매일 개방하고 싶지만 관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유라고 밝혔다.
▲ 중앙로는 단군만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단군도(檀君道)라고 한다. 일반인은 오른쪽과 왼쪽 출입로로 걸어가야 한다(사진=윤한주 기자)
문을 열자 단군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에 길이 있고 주위로는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정성껏 가꾼 흔적이 보였다.
충북에는 증평, 청주, 청원 등 3곳에 단군전이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관리나 운영에서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오른쪽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육 회장의 말로는 단군전이 세워질 때부터 있었다. 마치 신단수(神檀樹)처럼 그때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모습이다.
단군전으로 가는 길은 3갈래다. 중앙과 좌우길이 있다. 중앙길은 아무도 밟을 수가 없다.
“단군도(檀君道)라고 그래요. 좌우는 출입로이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어가려면 어떻게 넘어가느냐? 읍한다잖아요. (허리 숙여 절하고) 넘어갔다가 다시 읍하면서 넘어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배운 바로는 그렇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매년 단군이 승하한 어천절(음력 3월 15일)과 개천절(양력 10월 3일)에 단군제례를 지낸다. 이때 초헌관과 아헌관 등 집사들은 출입로로 입장한다. 분향을 맡은 사람은 단군도로 갈 수 있다.
▲ 증평 단군전에는 단군 영정, 위패 등이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단군전은 김기석 선생이 정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각지붕 목조기와로 지었다. 현재의 모습은 군에서 중축한 것이다.
안은 어두웠다. 전기 스위치도 없었다. 화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군 영정 앞에는 국조단군지위라고 적힌 위패와 초 2개만 있었다. 절을 몇 번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니 4배라고 했다. 향을 피우고 육 회장과 참배했다. 단군제례의 경우 분향강신,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순으로 치러진다.
연간 방문객은 200∼300명이다. 이 가운데 100명 정도가 외부에서 온다. 대부분 인터넷 검색으로 방문한다. 시내 어디서나 10분 거리의 접근성이 장점이다. 인근 주민은 명절에 소수로 참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없다. 군에서 36억 원의 예산을 들인 단군공원이 조성된다면 많은 사람이 방문하지 않을까?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소개한다.
■ 증평군 단군전(충북 증평군 증평읍 증평리 17)
1. 자동차
중부고속도로 증평IC --> 증평방향 --> 증평군청사거리 우회전(증평역 방향) --> 삼일로--> 동진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 옆으로 걸어 내려가면 있다.
2. 버스
증평시외버스터미널 -> 동진아파트 방면으로 걸어서 10분(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 창설자 김기석 선생
1897년 충남 보령시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부모를 잃고 외로운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 때 홍성군 광주시장에서 만세행렬에 참가한 후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하여 도피했다가 증평에 와서 광산업과 자전거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김 선생은 해방 후 잠시 정당생활을 할 때 국토통일을 위한 민족의식 확립에는 국조 단군 숭봉운동을 펴는 것이 효과적인 길이라 생각했다. 그는 사재를 털어 1946년에 착공하여 1948년에 현재의 본전과 정문 부속 건물까지 준공시키고 천진(天眞)을 봉안했다. 제향의식은 유교의 제례에 따르고 있다. (이강오 전북대 명예교수, <한국신흥종교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