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2만~3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있다. 이상하거나 촌스러운 이름을 주로 바꾸던 예전과 달리 법원의 개명신청이 완화된 요즘엔 운명을 바꾸기 위해 이름을 바꾼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건강과 성공이 이름에 달려 있다는 성명철학姓名哲學에서는 한자의 획수나 발음을 가지고 음양오행을 따지고, 이름이 사주와 맞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름이 우리의 뇌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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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면 실력, 안 되면 이름 탓?
최근에 예일 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의 심리학자들이 ‘이름효과(name-letter effect)’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발표했다. 이름효과는 이름의 머리글자가 행동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가설로 1985년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예를 들어 빌Bill이 버펄로Buffalo에 살 확률은 B로 시작하지 않는 다른 지역보다 높고 직업, 배우자의 성도 이름의 머리글자와 일치하는 경우가 높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이름에 따라 좋아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성적과 성공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것이었다. 연구진은 6천398명의 야구선수와 1만5천 명의 MBA 학생들, 294명의 학부생, 170개의 로스쿨의 자료를 분석했다고 한다.
연구진들이 수십 년간의 통계들을 살펴보니 K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야구선수들이 삼진을 당하는 비율이 다른 선수들보다 더 높았다. 모든 야구선수들은 K로 표시되는 삼진을 당하지 않고 안타를 치려고 마음먹는데도 말이다. 또 C, D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학생들의 성적은 A, B로 시작되는 경우보다 낮았다.
연구진의 한 사람인 레이프 넬슨 Leif Nelson 교수는 ‘부정적인 단어와 연결되는 머리글자는 부정적인 효과를 내기 쉽다’고 말했다. 반면에 긍정적인 방향으로는 그 효과가 적었다. A, B로 시작되는 이름을 가진 학생들의 성적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
다행스럽게도 이름효과는 성명철학에서 말하듯 운명을 좌우하는 정도는 아닌 듯하다. 우연에 의한 것보다는 크지만 이름이 많은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연구진은 말한다. 이름의 철자와 상관없이 우수한 결과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방식의 이름을 쓰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발음이나 의미, 성명철학의 풀이들이 미치는 영향들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적으나마 이름이 성공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인간의 사고에서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돌고래도 서로를 부르는 이름이 있다는 보고가 있지만 수많은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세계를 인간의 뇌가 잘 인지하기 위해서 이름은 없어서는 안 될 도구다. 인간은 개인뿐 아니라 모든 사물에 이름을 붙인다.
수많은 네발짐승들도 토끼와 호랑이처럼 이름에 따라 먹이와 위험으로 구분된다. 지구상 모든 사람들도 남자와 여자에서부터 갖가지 이름에 따라 분류된다. 수많은 성질과 묘사를 하나의 단어로 축약하는 것이다. 범주화(categorization)라고 불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계의 정보는 단순화되고 동시에 여러 가지 정보들을 엮어낸다.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때 연관된 수많은 사물들과 사건들, 개념과 감정들의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함께 연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름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뇌 속에 효율적으로 담아두고 처리할 수 있다. 그러니 좋은 이름이란 사물의 정보를 잘 반영하면서도 긍정적인 이미지의 정보들과 잘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과 무의식의 함정
문제는 이름의 무의식적인 정보처리 과정에서 나오는 부작용이다. 무의식은 복잡한 현실을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 좋은 도구다. 직관이나 창조적인 발상은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는 두뇌의 연산에 의해 일어난다. 하지만 빠른 만큼 잘못된 처리도 많다.
특히 부정적인 정보의 연결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경우 이름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름효과는 부정적인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연결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또 다른 함정은 이름을 대상 그 자체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름 석자를 아는 것만으로도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 집단에 붙인 유치한 별명과 꼬리표가 곧 그 집단의 성격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품의 경우에도 상표를 볼 때와 보지 않을 때에 뇌의 만족도는 달라진다. 이처럼 우리는 이름과 실제를 혼동하고 종종 그 사물 자체보다는 이름에 집착할 때가 많다.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도 향기롭다
개명을 통해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도 사실은 이름이 가리키는 자신의 정보를 바꾸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고,이름을 바꾸는 것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연결된 부정적인 정보의 사슬을 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도 향기롭다. 이름에 연상되는 정보는 조금 바뀔지라도 그 본질을 바꾸진 못한다는 말이다.
물론 좋은 이름이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주위와 자신의 기대가 높아질수록 실제로도 이루어지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름이 나빠서 운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 자기충족적 예언을 만들어낸다. 이름의 주술적인 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말을 현실화시키는 뇌의 경향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먼저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정보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의 힘도 우리의 뇌가 그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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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sy)
자기충족적 예언이라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선정한 기대에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맞추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래전부터 동서양의 현자들이 말하던 것이지만 사회학적으로는 20세기에는 미국의 로버트 머튼 Robert K. Merton이 이론화했다.
가령 ‘나는 실패자야’라고 말하면 자기가 말한 그 정보에 따라, 무의식적인 과정에 의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넓게 보자면 가짜 약이 효과를 발휘하는 플라시보 효과도 자기충족적 예언과 같은 맥락이다.
부정적인 자기충족적 예언은 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나 정의를 내려 다음 행동들이 처음의 잘못된 생각들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처음의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든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어떤 정보를 선택하면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항상 부정보다는 긍정의 정보를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글·김성진 daniyak@brain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