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기사로 보도하지 않으면 사건으로 끝난다. 사실도 기록하여야 역사가 된다. 기록하여 역사를 남긴 사람들. 왕조시대에는 사관(史官)이라 하였다. 이 시대 사관은 제왕이라도 꺼리는 관리였다. 사관제는 중국에서는 황제(黃帝) 때에 시작되었다. 천자와 신하의 좌우에서 그들의 행동을 기록하는 좌사(左史)와 말을 기록하는 우사(右史)를 두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광종 때에 당(唐)의 사관제도(史館制度)를 본떠 궁에 사관(史館)을 설치했다.
사관은 고려·조선시대에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찬술하는 사관(史館)·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또는 춘추관)에 소속된 수찬관(修撰官) 이하의 모든 관원을 말한다.
좁게는 조선시대에 기사관(記事官)을 겸한 예문관의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을 말한다. 대개 사관이라 할 때는 이 협의의 사관을 의미하였다.
조선시대 실록 편찬을 담당한 춘추관의 관직은 전임(專任) 없이 모두 다른 직과 겸하였지만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한 예문관의 사관 8명(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은 역사 기록에 관련된 직무만 전문으로 담당했다. 이들을 일컬어 한림(翰林)이라고도 하였다. 품계로 따지면 정7품에서 정9품까지 직위는 매우 낮았지만 항상 임금 곁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아 만인지상조차 눈치를 살피는 존재들이었다.
▲ 소설 '왕을 기록하는 여인, 사관' 표지.
사관 제도는 정확한 직필(直筆)로써 국가적인 사건, 임금의 언행, 관리들의 공과, 그 시대의 사회상 등을 기록하여 후세에 정치를 하는 데 거울로 삼게 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임금조차 볼 수 없었고,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수정도 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권력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검열하지 않도록 일종의 면책권을 주었다.
박준수의 소설 《왕을 기록하는 여인, 사관(上, 下)》(도서출판 청년정신)은 이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배경은 단종(端宗, 1441~1457)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世朝, 1417 ~ 1468) 집권 말기.
《왕을 기록하는 여인, 사관》은 죽음이 멀지 않음을 예감한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켰던 계유정난( )과 단종의 선위와 죽음을 정당화하고 역사 속에서 성군으로 살아남고자 노심초사하는 과정에서, 수양을 아예 역사의 미아로 만들고자 하는 의문의 무리 그리고 후세에 진실을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관들의 이야기이다. 그동안 소설이든 드라마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폭풍의 시대를 살았던 사관들은 어떤 존재인지, 진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분투하는 사관들의 맨얼굴과 역사가 갖는 의미를 이 소설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느 날, 조선시대 초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예문관 사관들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 남장 여인 서은후. 그녀는 예문관 대교 윤세주로부터 사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과 직무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둘 사이에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한편 감쪽같이 사라졌던 계유정난의 기록인 ‘정난일기’가 다시 나타나면서 궁궐에는 폭풍이 일기 시작한다. 한명회를 비롯한 정난공신과 수양 사이에 서로에 대한 의심과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내용을 알 수 없는 한 장의 가장사초를 찾기 위해 수양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가노 막동 패거리와 의문의 무리들 사이에 벌어지는 칼부림 그리고 도난당했던 정난일기를 처음 발견한 기사관 김탁우가 행방불명된다.
김종서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던 계유정난을 기록한 ‘정난일기’와 단종이 왕위를 넘겨주기 전날 병풍 뒤에서 수양대군과 나눴던 대화를 듣고 기록한 입시사관의 사초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암투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교직된다.
역사를 왜곡하려는 자. 역사를 지키려는 자. 진실을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역사전쟁. 일본, 중국의 우리 역사 왜곡이나 한국사 국정화 논쟁을 보면 역사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까. 소설 속의 한 대목을 보자.
실록청에 불을 지르려는 은후에게 세주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역사란, 마지막에 살아남은 자들이 쓰지. 하지만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후인들이라네. 후인들은 그리 어리석지 않을 것이네. 그들이 아무리 역사를 왜곡할지라도, 후인들은 반드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어 엄중한 평가를 내릴 것일세.”
그런데 여자 사관은 가능한가. 역사를 기록하는 여인, 여사(女史)은 고대 중국에 존재했다. 우리나라는 없었다. 조선 중종(中宗) 때 여사를 두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 중종 14년(1519) 4월22일 동지사(同知事) 김안국(金安國)이 중종에게 “여사(女史)를 두어 규문(閨門) 안에서 임금의 거동과 언행을 모두 다 기록하게 하자”고 아뢰었다. 하지만 중종은 듣지 않았다.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사진. 도서출판 청년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