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9년 국내 최초로 간질 전문클리닉을 개설해 황무지였던 국내 뇌의학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아주대 신경과 허균 교수. 작년 7월 보건복지부에 간질환자도 장애인으로서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쏟았던 그는 현재 간질학회의 사회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뇌질환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을 바꾸고 간질환자의 권리회복 및 사회복지문제 해결에도 발 벗고나서고 있다.
“현대의 신경과학자들은 우리의 정신이 어떻게 왜 진화하게 되었는가라는 역사적 측면보다는 지금 현재의 구조와 작동방식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물질의 기원과 진화를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우주론과 물질의 구조를 다루는 입자물리학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전자는 역사적인 지향성을 드러내고, 따라서 필수적으로 불확실하고, 고찰적이며, 무제한적이다. 반면 후자는 훨씬 더 경험적이고, 정확하며, 궁극적인 해답에 따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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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간 한국 의학계에서 가장 발전한 분야는 단연 신경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9년 그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국내에 신경과라는 분야 자체도 없었고 단지 내과 속에 육내과라고 분류했었다. 하지만 허균 박사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인간의 뇌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국내에는 그런 기회가 없었기에 1백통이 넘는 편지들을 미국의 각 대학들에 보내며 학교를 찾아보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그 앞에 놓인 행운의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그에게 미네소타 대학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후 귀국한 그는 동료 이병인 교수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서 국내 최초 간질클리닉을 개설하여 6년간 운영하였고, 94년 이후부터는 아주대학 병원으로 자리를 옮겨와 현재까지 신경과 교수로 연구와 진료를 하고 있다. 뇌에 대한 열정이 그를 뇌의학자로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고 어느덧 16년이 되어간다. 그 사이 그는 국내 신경의학의 권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뇌, 끝없는 갈구의 대상
“뇌는 믿기 힘들 만큼 복잡하다. 그러나 과연 뇌가 무한히 복잡한 것일까? 신경과학자들이 뇌에 대한 지식을 얻어가는 속도를 감안한다면, 수십 년 내에 고도로 효율적인 뇌 지도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본래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의예과 시절부터 정신분석학 분야의 도서들을 깊이 탐독했다. 그래서 본과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정신과를 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그를 신경과로 이끌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다른 학업에 한 눈 팔지 않았을 것이라고, 정신을 관장하는 뇌야말로 그에게 있어 영원히 ‘자유’와도 같은 끝없는 갈구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가 뇌혈관 질환 중에서도 간질을 전공으로 한 연유 또한 이런 정신분석학의 이해에 대한 토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간질은 뇌 기능의 일부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 의식을 잃거나 사지를 떨면서 침을 흘리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탓에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는 뇌질환의 하나다.
“간질은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에 생긴 경화증이나, 뇌종양, 고열, 뇌염 등으로 인한 각종 뇌손상 때문에 일어나는 질환입니다. 그러나 우선 간질이 무엇인가부터 논하기 전에 간질에 대한 인식 자체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보통 ‘간질’이라 하면 굉장히 섬뜩하거나 야만적인 병으로만 취급되기 쉽지만 사실 그것은 간질에 대해 교육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발작이란 증상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에 사회에서 무척 소외되고 격리된 어두운 병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간질은 전 인구의 1%가 앓고 있는 병으로 사회적 편견으로 방치하기엔 생각보다 중한 병이며 주위의 도움이 절실한 병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그나마 의학이 많이 발달해서 간질치료제나 수술을 통해 많은 환자들이 재발없이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간질에 대한 선입견은 여전합니다”
라고 말하는 그는 간질은 단지 일시적인 뇌기능장애가 일어날 때 나타나는 신체적 증상일 뿐 그 사람의 정신적인 역량이나 능력을 의심할 만한 징후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하자만 역사적으로 볼 때 천재들 중에 간질증세를 앓고 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측두엽 간질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예 이지요. 그는 자신의 소설 <백치>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백작을 간질환자로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나 알렉산더대왕, 나폴레옹, 노벨, 모파상, 단테 등 매우 뛰어난 지도자나 현인들 또한 간질환자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훌륭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뇌는 컴퓨터 이상의 그 ‘무엇’이다
“설령 신경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를 배胚의 뇌가 아니라 자연으로 국한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제기하는 의문은 국부적일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학습하고, 기억하고,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듣는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런 물음들이 대답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루기 쉽다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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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궁극적인 기능이 대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는 이렇게 답한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현실은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 자체 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밤에 잠들면서 내일이 존재하고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자각하게 되지요.
이러한 존재와 자각을 주는 것이 바로 뇌입니다. 물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삶을 영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궁극적으로 뇌는 인간의 정신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일반적으로 뇌를 컴퓨터에 비교합니다만, 뇌는 컴퓨터 이상의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간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외부로부터 받은 정보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좀 더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좀 더 풍요롭게 오래 살 수 있는 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둡니다. 사실 그것도 틀린 생각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것은 뇌를 단순작업으로서의 컴퓨터에 치부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뇌가 있으므로 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존재하는 것인데, 이는 너무나 당연해서 자각하지 못할 뿐이지요.
이것은 마치 공기와도 같아서 평소에는 숨을 쉬고 있다는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다 물속에 들어가는 순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뇌가 가지고 있는 뇌의 구조적인 기능에만 치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사실 여태까지의 신경계의 뇌에 대한 연구는 아주 협소한 관점으로 비춰집니다. 낱개의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과도 같은데 이 퍼즐이 다 맞춰지고 나면 과연 이것이 무엇이 될지, 어떤 일을 하게 될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한 상황입니다.”
신경과학의 지평을 확장
“20세기 과학은 엄청난 역설을 낳았다. 지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우리가 곧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예견에 이르러 만든 바로 그 엄청난 진보와 동시에, 과연 우리가 어느 것 하나라도 확실히 알아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일으킨 것이다.”
허균 박사는 최근에 자신이 가장 정독하고 있다는 존 호건의 를 인용하며 이야기를 이어가곤 했는데, 그의 평생의 과제이자 모토인 ‘신경과학의 지평을 확장하자’라는 소견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라고.
의학계에 몸담고 있던 지난 25년간의 그는 신경과학의 지평을 확장 시키는 작업과 동시에 대중들의 뇌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을 일으키고자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수 천 만년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는 바로 그 곳, 뇌에 대한 이야기야 말로 그에게는 무엇보다 흥미롭고 반드시 해내야할 사명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많은 의사들이 아픈 이들을 돌보고 있지만 그중 인간 본연의 존재와 인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의 뇌에 대한 애정은 곧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그 애정이 또한 그가 만나왔던 또 만나게 될 많은 환자들의 치유에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기자는 설렘마저 느껴졌다.
“우리의 뇌는 우주의 별보다도 많은 수천 수억 개의 세포들이 뭉쳐진 조직입니다. 그래서 뇌를 공부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요. 때문에 뇌를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뇌를 둘러싼 정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한 뇌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실험실이나 진료실을 떠나 반드시 사회에 환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안정희 ajhee@powerbrain.co.kr 사진│김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