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더 이상 인간의 강점이 아니다
어떤 것에 대해 “모르겠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드는가? 정보가 넘쳐나고 지능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모른다고 인정하는 일은 종종 불편한 감정을 동반한다. 더러 위험하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다. 자신감은 능력의 증거이고, 지식은 힘이라는 생각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모른다고 인정하는 무지보다 안다고 자신하는 지식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양 철학의 출발점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것처럼, 자신의 무지를 인지하는 것은 사고의 실패가 아닌 지혜의 시작이다. 철학(philosophy)이란 지혜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을 넘어 초지능(Artificial Super Intelligence)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의 범위를 크게 확장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 AI가 다룰 수 있는 지식의 규모를 생각하면, 인간이 가진 지식은 상대적으로 점점 더 작아 보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고려하면, 아는 것이 더 이상 우리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성숙한 인간 정신의 특징 중 하나는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가치가 줄어든다고 느끼지 않는 힘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지도 않는다.
AI 시스템은 이와는 다르게 작동한다. 기본적으로 답을 생성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생성형 AI는 데이터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모르겠다”고 답하기보다는, 그럴듯하지만 틀린 답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우리는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이러한 현상이 많이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답을 생성하는 시스템의 구조적 특성은 변하지 않았다.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취약함이 아니라 지적인 성숙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마음이 정직하고, 정신이 단단하며, 배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이다.
앎의 역설
우리는 보통 더 많이 알수록 확실성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식은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현실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실시간 교통 정보를 생각해 보자. 정확한 정보가 공개되는 순간, 운전자들은 경로를 바꾸기 시작한다. 그 결과, 교통 시스템 자체가 다시 조직된다. 정보가 정확할수록 행동 변화는 더 크게 일어난다. 즉, 지식 자체가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폐쇄되고 통제된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 이상, 지식은 절대적 확실성으로 수렴될 수 없다. 우리의 앎 자체가 환경을 변화시키고, 시스템은 그 변화에 따라 진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동시에 더 많은 미지와 마주하게 된다.
현대 물리학 역시 ‘완전한 지식’이라는 꿈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충분히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물질을 절대 영도(absolute zero)까지 냉각한다면 이론적으로 모든 움직임이 멈추기 때문에 모든 입자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완전한 정지는 완전한 확실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입자의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없다. 이것은 측정 장비의 한계 때문이 아니고, 일시적인 기술 문제도 아니다. 현실이라는 구조 속에 내재된 특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본적인 불확실성이 정말 우리를 제한하는 것일까? 만약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 알려져 있고,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삶은 어떤 느낌일까?
인간의 호기심은 탐험, 과학, 예술, 그리고 문명 자체를 움직여 온 힘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지능의 가장 중요한 표현 중 하나이다. 신비가 없는 세계는 단순히 예측 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생명력이 없는 세계일 것이다.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의 빈칸이 아니다. 그것은 호기심이 숨 쉬고, 실수가 허용되는 공간이다. 불확실성은 지식의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며, 선택과 창조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더 깊이 안다는 것
물론 기존의 지식은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고정된 지식은 관념으로 작용한다. 지식에 자신의 정체성이 묶이면, 이는 곧 관념의 사이즈가 된다. 확실성을 잃는 것은 마치 자신을 잃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성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지식을 얻고자 한다.
하와이를 여행하면서 열대우림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생태계의 밀도와 복잡성이었다. 숲에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생명체들이 층을 이루며 얽혀 있었다. 서로 다른 필요와 리듬, 목적을 가진 종들이 끊임없이 적응하고 공존하며 이뤄낸 광경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복잡한 얽힘이 있었지만, 그것은 무질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지휘자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롭게 느껴졌다.
이해관계가 제각각인 사람 서너 명이 모여 일할 때도 서로 의견을 조정하고 협력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런데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에 속한 수많은 개체가 공생의 시스템을 이루는 일은 어떠할까?
진정한 협력에는 지능, 공감, 인내, 그리고 반응성이 필요하다. 그 숲에 서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정교한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이 살아있는 질서를 조직하는 힘을 우리는 무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지능’ 외에 이것을 지칭할 수 있는 말이 있는가?
이런 경험은 우리가 말하는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누군가 어떤 사물을 가리키며 “이게 뭔지 알아?”라고 물을 때 “안다”고 답한다면, 이는 대부분의 경우 그 사물의 이름을 안다는 뜻이다.
사물이나 개념에 이름을 붙이는 인간의 능력은 서로 간에 의사소통과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름은 앎의 표면일 뿐이다. 그보다 더 깊은 앎은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감각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감각질(qualia)’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공감과 연민, 그리고 인간성의 토대가 된다.
때로는 앎이 통찰(insight)의 형태로 찾아온다. 통찰은 점진적으로 축적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번개처럼 나타나 우리의 인식을 재구성하고, 우리의 시각을 바꾼다.
기계가 이름과 숫자, 패턴을 조직하는 능력이 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능력들 속에서 우리의 강점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오히려 공감 능력, 감수성, 통찰 같은 더 깊은 층의 앎을 개척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과 가치를 키우는 길이 될 수 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내는 실천적 태도
가속되는 변화의 바다를 항해할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도움이 될까? 항상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일까, 아니면 불확실성의 경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일까?
세상이 우리의 멘탈 모델보다 더 빠르게 변할 때, 확실성을 붙잡으려 할수록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미지를 제거하려 하기보다, 미지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시대에 삶을 항해하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실천이 도움이 될 것이다.
• 반응하기 전에 잠시 멈추기
• 가상의 두려움과 사실을 구분하기
• 현재의 결론을 최종으로 보지 않고 잠정적으로 유지하기
• 미래 예측보다 내면 회복에 투자하기
• 무엇이 진정 내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지 선택하기
• 호기심 잃지 않기• 공감, 통찰과 같은 더 깊은 층의 앎을 탐구하기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불확실성과 함께 흔들릴 필요는 없다. 미래는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어쩌면 지식이 멈추는 지점에서도 침착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의 것일지 모른다.
글_스티브 김 IBREA Foundation 이사. 《공생의 기술》 공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