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존재의 뇌과학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최근 몇 달 동안 갑자기 일이 몰려 어려움을 겪었다. 예정해 둔 해외여행을 앞두고 원고 마감과 단행본 편집 마감, 잡지 편집 마감이 동시에 맞물린 것이다.
여행을 다녀오자 미처 확인하지 못한 지원 사업의 마감까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부랴부랴 사업 지원서를 마무리하고 나니 이번에는 단행본 원고 2개가 동시에 들어왔다. 원고 검토를 하느라 정작 그 시간에 하기로 했던 작업은 뒤로 밀렸다.
스트레스와 압박감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실수도 잦아졌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옷은 사이즈 선택을 잘못했고, 무료 체험 기간에 가입한 서비스는 해지 타이밍을 놓쳤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들이었다.
결핍이 불러온 악수들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쓴 하버드대학교 행동 경제학자 센딜 멀레이너선과 프린스턴대학교 인지심리학자 엘다 샤퍼는 닥친 일에 매몰돼 시야가 좁아지면서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는 이유를 ‘터널링’ 때문이라고 했다.
터널에 갇혔을 때 멀리서 빛을 발하는 출구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듯, 좁은 범위에 주의력을 집중한 나머지 다른 것들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미팅이 잡혀 있는 기업 CEO도, 카드 돌려막기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실업자도 터널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간이든 돈이든 결핍이 일어나면 극도로 좁은 인지적 터널이 만들어지고, 이 터널은 우리의 종합적인 인지 능력이라는 정신적 자원을 빠르게 소진시킨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손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악수를 두게 한다. 가난한 사람은 돈을 빌리고 바쁜 사람은 미래의 시간을 끌어와 쓴다.
개인적으로 마감 때문에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이 미래에서 시간을 빌려와 쓰는 거라는 개념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빌린 시간에는 어김없이 청구서가 따라붙는다.
뒤로 미뤘던 일이 원금으로 그대로 남아 있고, 빌린 돈에 이자가 붙듯 밀린 일을 다시 시작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 총량은 처음보다 더 늘어난다. 미룬 일을 복기하고 다시 시작하는 데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더 깊은 결핍 속으로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그들 스스로 가난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기 가게에서 팔 물건을 1,000루피에 떼어와 1,100루피에 파는 인도의 시장 상인들은 빌린 돈으로 물건을 사기 때문에 하루 100루피의 수익 중에 50루피를 이자로 내야 한다.
그러니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고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매일 5루피씩 200일만 저축하면 돈을 빌리지 않고도 물건을 살 수 있고, 심지어 복리를 활용하면 그 시간을 훨씬 앞당길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렇게만 되면 이자를 갚지 않아도 되니 순수익은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시장 상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실 인도 상인까지 갈 것도 없다. 내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눈앞에 닥친 일에 급급해 정작 해야 할 일을 방기하고 있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운 좋게 이번 마감은 넘긴다 해도 다음 마감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일정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데 쓰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눈앞의 연체금을 갚으려고 이자율이 높은 카드론을 쓰면서 더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신용불량자처럼, 마감의 덫에 갇힌 기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한 차례의 빚 탕감, 한 번의 마감 성공으로 저축할 돈과 시간 여유가 생긴다고 해도 결핍의 덫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연구팀은 평균 9년 6개월 동안 빚을 갚느라 돈을 모으지 못하는 인도의 시장 상인들 빚을 일시 탕감해준 적이 있는데, 그들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데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세인트 병원의 수술실 비우기
왜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두세 배의 일을 하면서도 여유가 넘치는데, 어떤 사람은 고리대금업자에게 쫓기듯 매번 초치기로 마감을 하는 걸까? 저자는 개인의 의지나 능력보다 결핍감이 우리의 시야를 좁히고 판단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자의든 타의든 결핍의 터널 안에 들어간 사람은 창공의 독수리처럼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사냥감을 노릴 타이밍을 잴 수 없다. 그저 눈앞의 장애물을 헤쳐 나가는 데만 급급할 뿐. 실제로 이런 인지적 터널에 갇히면 IQ가 10 이상 떨어지는 수준으로 판단력이 급격히 낮아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결핍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세상의 수많은 결핍에 대처하여 두 저자가 제안하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느슨함’이다. 저자는 미국 급성 환자 전문 병원인 세인트존스병원을 예로 든다. 그 병원은 항상 수술실이 모자라서 곤란을 겪었다.
수술실 일정은 언제나 100퍼센트 가득 차 있어서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예정된 수술을 뒤로 미루고 먼저 응급 수술을 해야 했다. 의료진들은 급하게 잡힌 응급 수술과 미뤄진 수술 일정을 모두 소화하느라 늘 녹초가 되곤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영진이 전문가를 초빙했는데, 전문가는 수술실을 늘리는 대신 수술실 하나를 완전히 비워두라고 조언했다. 언뜻 듣기엔 이해가 가지 않는 솔루션이다. 돈이 부족해 추가 대출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돈의 일부를 떼어놓고 쓰라는 말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방법은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긴급 상황에 대비해 수술실 하나를 비워두자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수술 건수가 바로 5.1퍼센트 증가했고, 새벽 3시 이후 수술도 45퍼센트나 줄었다. 당연히 의료진의 추가 근무가 급격히 줄었고, 업무 효율도 높아졌다.
사실 문제는 수술실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그저 수술실 일정이 가득 차 있어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이전에는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예정된 수술이 연달아 뒤로 밀리면서 모든 일정이 틀어졌다. 말하자면 세인트 병원에서 결핍된 것은 수술실 개수가 아니라 언제라도 닥칠 수 있는 위기 상황을 대비한 ‘느슨함’이었던 것이다!
이 통찰은 어찌 보면 심각한 모순으로 들린다. 바쁘게 돌아가는 병원에서 어떻게 느슨함을 고려할 수 있단 말인가. 특히나 속도 경쟁에 특화된 한국 사회에서 느슨함은 가치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능력하다는 평가를 받고, ‘투잡’을 뛰고 하루를 48시간처럼 바쁘게 사는 정도나 되어야 ‘갓생’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느슨함은 낭비가 아니라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방지턱 같은 것이다. 커피 그라인더에 원두를 가득 채우면 돌아가지 않듯이 조직이든 일상이든 빈 공간과 시간, 즉 느슨함이 있어야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열심히 일할수록 생산성은 떨어진다
세인트 병원 사례에서 영감을 받은 나는 즉시 내 빽빽한 일정에도 빈틈을 적용해 보기로 했다. 그전까지 마감이 몰아칠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빈 시간을 테트리스 맞추듯 타이트하게 일로 채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초반에만 잠깐 효과가 있고, 만성적인 마감 지연에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사소한 실수에도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일이 꼬이거나 일정이 연쇄적으로 미뤄졌다.
그러다 보니 일정을 조정하는 데 에너지를 추가로 써야 했고, 이곳저곳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으며, 집중력도 눈에 띄게 흩어졌다.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는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 시간당 생산성 최하위를 달리는 국가 중 하나라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우리가 너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너무 열심히 일하면 일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뇌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량이 줄어들고, 결국 번아웃에 이르게 된다. 번아웃은 과도한 스트레스, 업무 과중, 감정 소진 등이 누적되어 심리적 육체적으로 탈진된 상태다. 이런 상태가 심해지면 단순한 피곤이나 스트레스를 넘어 깊은 무력감과 삶의 의미까지 상실하게 된다.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2년에 19세에서 34세 사이의 청년 1만 5천 가구를 조사한 결과, 약 34퍼센트가 번아웃을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의도적으로 느슨해지기
또 하나, 만성 시간 결핍 상태에서는 스트레스와 불안, 압박감 때문에 주의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자제력도 사라진다. 어쩌면 일이 미뤄지고 실수가 잦아지는, 눈에 보이는 리스크보다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정신적 자산이 빠르게 소진된다는 사실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시간 결핍으로 인한 정서적 리스크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내 캘린더에도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는 충동을 자제하게 되었다.
시간 결핍 상태에 빠지면 자투리 시간에 단순 업무들을 끼워 넣어 조금이라도 일을 만회해 보려는 충동이 인다. 그러나 우리 뇌가 업무 모드를 전환하는 데는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단순 업무를 마치고 다시 집중 모드로 돌아오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 한 가지 업무를 충분히 본 후에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는 것이 실제로는 더 효율적이다. 즉 시간을 블록화하여 집중이 잘되는 시간대와 그렇지 않을 때의 업무를 분담하는 게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이 밖에도 하루 단위 일지만 쓰던 것을 주간 단위로 확장하였다. 실제로 주간 일정을 들여다보며 업무에 대한 시각적인 인지를 하는 것만으로도 자꾸 터널로 들어가려는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업무는 밀린 상태고, 지금도 복구를 해나가는 중이다. 그러나 결핍의 덫이 개인의 의지보다는 심리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로우며 바쁜 사람은 여전히 시간이 부족하다. 결핍은 결핍을 지속하는 심리 상태를 낳는다. 그러나 우리가 결핍의 덫에 빠질 때마다 세인트 병원의 빈 수술실을 떠올릴 수 있다면, 휘몰아치는 일정 속에서도 방지턱이 되어 줄 ‘느슨함’을 자가 처방할 수 있지 않을까.
글_전채연
출판 기획자이자 작가. 쓴 책으로는 《스님의 호흡법》, 《우리 뇌는 그렇지 않아》, 《휴맥스, 다시 벤처 정신을 말하다》, 《박지성처럼 꿈꿔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