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현대그룹을 창업한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1915~2001)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습니다. “이봐, 해봤어?”로 대표되는 정 회장의 어록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도전으로 일궈낸 인생관을 압축합니다. 그는 운명론을 거부합니다. “사주팔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때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 난다”라는 정 회장의 말에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뤄낸 수많은 성공의 역사보다 가출을 반복했던 어린 시절을 주목합니다. 그것이 스스로 흙수저(집안 배경이 좋은 금수저와 대비되는 말)라고 절망하는 1020세대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정주영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삿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6세에 송전소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무지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주영의 경영정신>의 저자 홍하상은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나 <십팔사략十八史略>까지 배웠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대학원 졸업생들도 못 따라갈 만큼의 학문적 소양을 이미 갖추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10대 정주영은 남들과 달랐습니다. 자기만의 꿈이 확고했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컸습니다. 단순히 가난이 싫어서 가출했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가출해서 인천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던 때입니다. 외국 배에서부터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배 위에서부터 육지로 옮기는 일이었죠. 정주영은 이런 꿈을 가지고 일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다음에 돈을 벌면 반드시 조선소를 짓겠다. 내가 등짐을 지었던 배를 꼭 내 손으로 만들겠다.”
당시 열아홉 살인 정주영의 꿈은 훗날 세계적인 조선회사인 현대중공업으로 이뤄집니다. 어떠한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의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해 첫 직장인 복흥상회 쌀가게에 입사합니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샐러리맨의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주영의 하루를 봅시다.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눈을 뜨면 쌀과 잡곡을 가득 담은 가마니를 가지런히 정돈했습니다. 쌀 창고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급히 배달을 나갈 때 쉽게 쌀이며 보리, 잡곡 등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복흥상회에는 여섯 명의 쌀 배달꾼이 있었습니다. 저녁 7시 쌀가게가 문을 닫고 나면 배달꾼들은 장기를 두거나 화투를 쳤습니다. 그러나 정주영은 책만 읽었습니다.
지금의 직장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동시간입니다. 법정 노동시간 8시간의 2배를 일한 것입니다. 그리고도 동료들과 놀지 않고 독서로 자기 계발하는 정주영을 보십시오. 불과 24살에 쌀가게를 물려받기까지 가장 많은 노동시간과 학습을 통해 전문가로 성장했다고 봅니다. 이것은 인사평가로도 알 수 있습니다. 복흥상회 주인의 딸인 이문순 여사는 청년 정주영에 대해 “다른 일꾼들과는 사뭇 달랐어요. 밤이 되면 항상 책을 붙들고 있었지요.” 라고 말했고, 이문순의 어머니도 늘 청년 정주영의 성실성과 독서열에 감탄했습니다.
반면 그의 아버지(정봉식)의 사고는 전근대적이었습니다. 가출한 아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다. 형제가 아무리 많아도 장손이 기둥인데 기둥이 빠져나가면 집안은 쓰러지는 법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고향을 지키면서 네 아우들을 책임져야 한다.”
만일 정주영이 꿈보다 가족을 택했다면 지금의 현대그룹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첫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동료처럼 지냈다면 어땠을까요? 창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원조 흙수저’ 정주영의 꿈과 도전정신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절망하는 1020세대가 꼭 들어야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글.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