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쓰기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쓰기

[칼럼]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의 자서전은 미국 하버드대학이 선정한 고전필독서 목록 가운데 첫 번째 권장도서이다. 이 책을 읽은 하버드대학생들은 놀라서 묻는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업적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인쇄업자, 신문발행인, 저술가, 과학자, 발명가, 외교관, 정치가, 건국의 아버지, 100달러 화폐의 모델 인물ㅡ벤자민 프랭클린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럼 벤자민 프랭클린은 어느 대학 출신일까? 하버드? 아니다. 그는 정규학교를 2년도 못 다녔다. 라틴어학교에 들어갔다 그만두고 사립학교에서 공부하다 그마저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학비를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프랭클린이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글쓰기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글쓰기가 자신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고, 성공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13세부터 글을 쓰고 15세에는 시사 민요를 써서 판매하고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다. 청소년들에게 글쓰기 강의를 하기 위해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쓰기를 다시 짚어보았다.

그가 처음부터 글쓰기를 잘했던 것은 아니었다. 글을 잘 쓰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형의 인쇄소에서 일할 무렵 프랭클린은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여러 가지 주제를 놓고 자주 논쟁을 했다. 만날 수 없을 때는 편지로 토론을 이어갔는데, 프랭클린이 쓴 편지를 본 아버지는 프랭클린이 철자법이나 구두점에서는 친구보다 낫지만, 표현의 우아함이나 전개 방식, 논리의 명쾌함은 훨씬 못 미친다고 평가했다.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프랭클린은 글을 쓸 때 더 신경을 쓰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다.
잡지에 실린 훌륭한 문장을 보면 글의 요점을 종이에 적어두었다. 며칠 후 책을 보지 않고 그 요점에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면 그 단어를 넣어서 원래의 문장에 가깝게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였다. 자신이 작성한 글과 원문을 비교하여 잘못된 점을 찾아내 고쳤다.
이렇게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벤자민은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형이 발행하는 신문에 익명으로 기고하여 호평을 받자 글쓰기에 자신감을 얻었다. 이렇게 시작한 글쓰기를 프랭클린은 평생 이어갔다.

 프랭클린은 또 모임을 만들어 토론과 글쓰기를 발전시켰다. 1727년 20세에 재능 있는 친구들을 모아 서로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토(JUNTO)' 클럽을 만들었다. 이 클럽에서 윤리나 정치, 자연과학에 관한 논제를 토론하고 석 달에 한 번 어떤 주제든 상관없이 에세이를 한 편 써서 발표했다. 모임 일주일 전에 논제가 정해지면 그에 관련된 책을 중점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주제에 맞는 토론을 할 수 있었다. 토론은 규칙에 따라서 진행되었고 서로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훌륭한 대화 습관이 만들어졌다.

훗날 정치에 입문한 프랭클린은 전토 클럽에 먼저 글을 발표하여 지지를 받은 후 법률 제정이나 정책으로 이어지게 했다. 경찰관 부정행위에 관한 글이나 소방대 조직 논문, 방위군 조직을 위한 ‘명백한 진리’, ‘펜실베이니아 청년 교육에 관한 제언’이라는 논문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글을 써서 여론을 호의적으로 조성한 다음 일을 추진하여 성공리에 실행할 수 있었다.

프랭클린은 또 글 한 편을 발표하여 큰돈을 벌게 되었다. 1729년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지의 경영자이자 편집자가 되었다. 당시 지폐 발행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는데, 전토 클럽에서 이 문제를 토론한 프랭클린은 ‘지폐의 본질과 그 필요성’이라는 소논문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이 글이 여론의 지지를 얻어 결국 지폐를 더 발행한다는 안건이 의회에서 다수결로 통과되었다. 이 공으로 그는 지폐 인쇄 일을 맡아 꽤 많은 이윤을 남겼다.

프랭클린이 1732년부터 발행한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이 또한 인기가 있었다. 프랭클린은 ‘리처드 손더스’라는 이름으로 발행한 이 달력 여백에 교훈이 될 만한 글귀를 써넣었다. 주로 근면과 절약이 부를 이루는 길이며 덕을 완성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심어주는 문구들이었다. 나중에 격언들을 모아서 지혜로운 노인이 경매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식으로 만들어 1757년 달력 앞부분에 실었다. 이 달력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프랭클린은 번개가 전기(電氣)라는 사실을 연을 날려 알아냈는데, 이는 ‘필라델피아 실험’으로 유명하다. 이 실험을 마친 프랭클린은 성공을 알리는 편지와 논문을 보냈다. 이 논문이 영국 왕립학회에 들어가 훗날 과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프랭클린이 논문을 쓰기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프랭클린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선언문을 기초한다. 프랭클린이 학교를 그만두었을 때 훗날 그가 미국 독립서언문을 기초하고 서명하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프랭클린은 1790년 사망할 때까지 글쓰기를 했다. 글쓰기는 그의 성공의 원천이었다.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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