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의 숲으로 들어간 마에스트로 금난새

청중의 숲으로 들어간 마에스트로 금난새

[두뇌 리더에게 듣는다]

브레인 17호
2013년 01월 14일 (월)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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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지휘자가 해설하며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전석 매진을 기록한 ‘청소년 음악회’를 비롯해 ‘마라톤 콘서트’, ‘로비 콘서트’, ‘제야 음악회’를 열고, 1998년 최초의 벤처 오케스트라 ‘유라시안필’을 창단하는 등 늘 남이 하지 않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 마에스트로 금난새(61, 유라시안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최고 두뇌경영자 과정 강사로 초청된 그는 자신의 음악처럼 잘 조율된 목소리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돈키호테 같은 엉뚱함이 나를 이끌다

“어릴 적엔 뭔가 돈키호테에 가까운 성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른들이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 하면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지만, 뒤돌아 서서는 ‘내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다소 엉뚱하고 약간 삐딱한(?) 아이였어요. 그러다 어느 신문에서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연설 말머리에 했던 유명한 구절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라는 글을 읽고 ‘아, 뭔가 나도 다르게 생각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치솟았죠.”

어릴 적부터 뭔가 다르게 바라보며 살고자 했던 금난새에게 그 글은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예고 작곡과에서 이론 공부를 하다가 서울대 작곡과에 들어갔는데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던 그는 서울예고 출신들을 모아서 오케스트라를 하나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연습실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미 공군 관련 건물에 있는 강당이 자주 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곧바로 건물 관리자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 연습실이 필요하다. 우리는 클래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작품도 연주한다. 그러니 강당을 빌려달라.”
그의 기대대로 건물 관리자는 미국 음악을 연주한다는 말에 눈이 반짝였다고 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나도 얻는다는 걸 터득한 순간이었다. 또한 지휘자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청중’이라는 숲을 발견하다

해외로 나가기가 쉽지 않던 당시, 금난새는 마침 ‘세계청소년음악연맹’ 이라는 행사에 옵서버로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스웨덴에서 연주를 마친 뒤 베를린에 가서 무턱대고 음악 대학을 찾아가 지휘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는지 물었다. 전화번호를 알아낸 즉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마침 직접 전화를 받은 교수는 내일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다음 날 교수를 방문한 금난새는 면담을 한 뒤 피아노도 치고 지휘도 해 보였다. 그러고 나니 교수가 “그냥 이곳에 바로 머무르는 게 어떻겠느냐. 너는 이미 나이가 많으니 빨리 시작해야 한다. 네가 원한다면 입학을 도와주겠다”라고 제안했다. 그가 바로 베를린 음대 라벤슈타인 교수, 금난새의 첫 은사이자 은인이었다.

“그렇게 귀한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난 입학시험에 떨어져버렸어요. 실망하고 있던 나에게 교수님은 ‘나중에 성공한다면 누가 지금의 너를 기억하겠느냐, 6개월 동안 내 수업을 청강하면서 공부해라’ 하고 용기를 주셨고, 그 후에 다시 시험을 보고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베를린은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에요.”

베를린에서 금난새는 연주에 있어 중요한 다른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청중’이었다. 금난새는 당시의 느낌을 “나는 지휘라는 나무를 보고 왔는데, 청중이라는 숲이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그후 그는 1977년 카라얀 콩쿠르에서 ‘마탄의 사수’ 서곡으로 3위에 입상했다. 당시로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입상 후에 조언을 얻고자 콩쿠르 심사위원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더니 추천서를 써주면서 엉뚱한 얘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난 일본을 자주 다녔는데 내 생각엔 한국도 빠르게 발전할 것 같다. 나라가 발전하면 음악 문화도 발전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 당시 유럽 대도시로 가고 싶었던 금난새에게 엉뚱한 조언이었지만, 그 말은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한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그후 한국에 온 금난새는 국립교향악단(KBS 교향악단전신)에서 오랫동안 지휘를 맡았고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런데 베를린에서 연주 이상의 가치, ‘청중’에 이끌린 그 마음은 오래도록 하나의 화두처럼 남아 있었고, 새로움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기질도 용솟음쳤다. 그러던 중 당시 어려움에 처한 수원시향에서 요청이 왔고 그는 과감하게 국립교향악단을 그만두고 수원시향을 택했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당시 수원시향은 존재감이 없었고 사정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런 곳을 좋게 바꾼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수원시향 단원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난 주식은 모르지만 오케스트라는 조금 안다. 나에게 투자를 해보지 않겠느냐.” 다소 황당해하는 단원들과 첫 만남 후 새해 시무식을 하는 날, 그는 시청사 로비에서 신년 음악회를 열어 시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음악회는 대성공이었고, 당시 수원시장은 곧바로 보너스를 내밀었다. 결국 그 공연은 지휘자와 단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뢰의 끈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도전은 계속되었다. 예술의전당에서 하던 ‘청소년음악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것. “사람들이 모두 초대권을 받아 음악회에 오는데, 어릴 적부터 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차라리 2천 원씩이라도 내도록 하고 해설도 하면서 새롭게 해봅시다.” 당시 처음으로 유료 전석 매진을 기록한 이 행사가 바로 국내 최초로 지휘자가 해설자로 등장해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전석 매진을 이어온 ‘청소년 음악회’의 시작이었다. 또 하나의 미친(?) 짓은 바로 제야의 종이 울리는 12월 31일, 타종에 맞춰 연 ‘제야 음악회’였다.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예술의전당에서 음악회를 열면 어떻겠습니까? 그동안 해보지 않은 것이지만, 분명 이런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금난새의 거듭된 설득에 황당해하던 예술의전당 측은 결국 두 손을 들었고, 당시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진행된 제야 음악회는 음악계의 새로운 문화가 되었다. 제야 음악회는 1994년부터 매년 개최해오고 있고, 다른 곳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작은 유혹을 그냥 놓치지 않는 성공 습관

2000년 금난새의 무한 도전은 결국 ‘벤처 오케스트라’라는 기업 형태의 유라시안필 창단으로 이어졌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을 한 푼도 받지 않는 오케스트라의 탄생이었다. 하나의 기업인 만큼 그는 결국 공연 장소와 후원처를 찾아 뛰어다녔고, 그중 눈에 띈 곳이 서울 테헤란로에 있는 포스코 빌딩이었다. 포스코의 넓고 높은 로비가 금난새의 눈에 들어왔던 것. “1층의 넓은 로비를 보니까 음악 연주에 아주 어울리던데 여기서 연주를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외국에서는 성당 같은 곳에서도 연주를 합니다” 하고 그는 포스코 측에 제안을 했다. 당시 포스코는 포항제철에서 민영화되면서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던 터라 이 엉뚱한 제안을 파격적으로 받아들였다.

1999년 12월 30일, 새천년을 앞둔 포스코 1층 로비는 1천 석 규모의 멋진 공연장으로 바뀌었고,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로비에 울려 퍼졌다. 그날 행사는 직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그 후 본사에서의 베토벤 전곡 공연을 비롯해 포항, 광양제철에서의 공연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이 벤처 오케스트라 유라시안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저는 작은 유혹이 또 다른 성공으로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지원 한 푼 없던 유라시안필이 1년에 1백40여 회가 넘는 공연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느끼는 작은 유혹을 그냥 넘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포스코 로비에서 펼친 공연은 제품으로 치면 하나의 샘플이었지요. 샘플을 써보고 만족스러우면 그 후에 계속 쓰게 되는 거니까요.”

그날의 성공이 있은 후로, 2000년부터는 두 달에 한 번꼴로 포스코 로비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연주했다. 그 뒤로 차이코프스키, 브람스 전곡 연주회도 열었다. 최근에 그는 계명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3년 전 계명대에서 한 공연이 인연이 되었다. 그 공연은 포스코가 후원해 유라시안필과 함께 1년에 10개 대학을 방문하는 ‘캠퍼스 심포니’라는 시리즈 중의 하나였다. 한 번의 만남, 작은 유혹을 놓치지 않는 그의 성공 습관이 계속해서 그를 더 큰 성공으로 이끌고 있는 셈이다.








사회에 필요한 예술인이 될 것

“몇 년 전에 영국의 한 연극배우가 인터뷰한 것을 보았는데, 기자가 ‘당신은 언제부터 유명한 연극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그 배우는 ‘나는 내가 유명한 연극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지금도 연극이 끝난 다음 꼭 조명기사에게 인사를 한다’고 대답을 했어요. 그 말이 내게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오케스트라 공연을 마치면 무대에서 맨 마지막으로 퇴장한다. 일반적으로 연주가 끝나면 가장 먼저 지휘자가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 뒤로 사라진 후 단원들이 차례로 나가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세계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문화를 시도하면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네기홀 같은 유명한 곳에서 연주를 했는지 안 했는지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나는 청중을 위한 연주를 할 겁니다. 그래서 사회에 필요한 예술인이 되려고 합니다.”

지휘자 금난새의 얼굴에서는 늘 ‘새로움’, ‘창조’, ‘도전’ 같은 단어가 익숙하게 떠오른다. 열정적으로 젊은 감각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그에게서는 근원적인 자신감이 엿보인다. 자신의 길을 꾸준히 개척해온 성공 체험이 그런 자신감을 형성하게 하지 않았을까.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그의 용기와 의지와 자신감이 앞으로 또 어떤 새로움을 창조할지 자못 궁금하다.


글·장래혁 editor@brainmedia.co.kr | 사진·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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